파견 생활을 오래하다 보면 매번 사람을 떠나보내고 남아 있는 자가 된다. 사람들을 비행기에 태워 보내고 홀로 덩그러니 공항에 남아본 적이 있는 사람은 그 마음을 알 것이다. 새로운 사람을 맞이하고 만나고 또 그 사람을 떠나보내고... 사람을 떠나보내는 것은 어떻게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마음이 공허해지는 일이었다. 나만 시간이 멈춰있는 기분이 든다. 떠나간 사람들은 나를 기억하고 현지를 추억한다. 나는 그들의 추억 속에서 살아가고 그들은 그들의 삶을 다시 바쁘게 살아간다. 일 년에 한 번씩 한국에 방문할 때 가장 실감을 하는데 그들에게 현재가 아닌 추억이 된 다는 건 뭔지 모를 씁쓸함이 든다. 아마도 나에겐 현재 진행인 것들이 그들에겐 지나간 과거가 되어서일까, 그래서 난 그들의 과거에 갇혀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남아있는 자임이 좋았다. 언제나 그곳에 있는 이 곳을 지키는 사람. 그들의 청춘 한 페이지에 나도 그때의 젊음으로 계속되어지는 것이 좋았다.

나는 이 곳이 좋았다. 26살, 이 곳에 파견되었을 때는 이렇게 오래 있게 될 줄은 몰랐다. 특별히 이 파견지가 좋아 서 선택한 것도 아니었고 적당한 파견 조건에 맞추어 온 것이었기에 딱히 애정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1~2년 정 도 생각하고 온 이 곳은 어느새 내 삶의 터전이 되었고 정착지가 되었다. 내가 꿈꾼 나의 미래는 다른 설명이 필요 없이 이곳이 배경이었다. 이곳을 떠나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 곳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파견된 나는 어느새 현지전문가로 불리어졌다. 언제나 이곳을 지키고 누군가에겐 추억인 이 곳에서, 그때가 그리울 때 나를 추억하고 나를 찾아 주기를 바랬다. 쓸쓸하고 공허했지만 자부심이 있었다. 이곳은 곧 나였다. 왜 이곳을 이렇게 사랑하게 되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누군가는 날씨는 덥고 습하고 우중충한데다가 일처리는 또 얼마나 느린 지 이래서 안되고 저래서 안되고 그래서 이 곳이 정이 안 가고 싫다 했지만 나는 덥고 습한 이 기후마저 사랑했다. 느리지만 기다리면 언젠간 되니까 마음이 바쁘고 급하게 일처리를 하려는 나를 느긋하게 기다리고 여유를 가지고 일할 수 있게 해주어 좋았다. (물론 한국에 있는 사람들은 답답했겠지만) 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티셔츠가 좋았고 쨍쨍 내리쬐는 햇빛 아래서 진을 쫙 빼고 더위를 가시기 위해 250원을 주고 길거리에서 마시는 전통음료를 좋아했다. 한번 외근을 나가 면 하루 종일 걸려 다른 업무는 하나도 하지 못해 밤 늦게까지 문서 작업을 해야 했지만 천천히 흘러가는 그 시간들 이 좋았다. 능숙하지 못한 발음으로 현지어를 구사하는 나를 기특하게 여겨주는 주민들이 좋았다. 나는 그렇게 이 곳에서 늙어가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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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말이 있다. ‘널 사랑하는 건지 아니면 널 사랑하고 있는 나를 사랑하는 건지’ 나는 개발협력이 좋은 것이 아니라 개발협력을 하고 있는 꽤 괜찮은 사람이 된, 이 세상에 조금은 보탬이 된 사람이 된 것 같은 나를 좋아했다. 이곳이 좋은 게 아니라 이곳에서 살아가는 내가 좋았다. 그 곳에 있는 나는 젊었고, 열정이 가득했고, 하루하루가 행복했고 사랑했다. 불안하고 서툴렀던 나를 웃으며 괜찮다 기다려주는 현지 직원이 있었고, 업무 미팅이 끝난 후엔 정성스런 음식을 차려주는 마을 주민들이 있었고, 그저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었을 뿐인데 아무것도 아닌 나를 대단하다 여겨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그 곳에서 꽤 괜찮은 사람이 되었다.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 건지. 2022년 나는 이 곳을 떠나는 자가 되었다. 한국에 돌아왔다. 언제 다시 돌아갈 수 있을지 기약 없는 한국행이 되었다. 잠깐 한국에 나와 있는 거라고 생각했고 다시 돌아갈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한국에 온 지 1년이 되었다. 1년이 되어가자 나는 향수병에 걸렸다. 그 곳에 있을 땐 한국 생각을 정말 단 한번도 한 적이 없는데 지금은 꿈에서 도 그 곳을 그린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본 것처럼 눈 앞에 그곳의 풍경이 그려진다. 생각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 냥 그 곳이 떠오른다. 떠나는 자가 된다는 것은 뒤를 돌아보게 했다. 아쉬움을 남겼다. 계속 그 곳에 있을 줄만 알고 나중에 하면 되지 나중에 만나면 되지 나중에... 그렇게 미뤄 왔던 관계들에 대한 미련이 남았다. 아직 떠날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준비가 되지 않은 나는 자꾸만 질척댄다. 다시 돌아가고 싶다고 나는 다시 가야만 한다고. 그래서 마음 정리를 위한 2주 간의 이별여행을 떠났다. 금방 돌아올 거라 생각하고 정리 없이 떠난 ‘내 집’에는 내 손길이 묻은 물건들이 그대로 있었지만 주인을 잃은 물건에는 하얀 곰팡이가 끼어있었다. 물건을 정리하면 정말 이 곳을 떠나는 것만 같아 일주일 간은 현실을 외면하고 평범한 하루 하루를 보냈다. 돌아가는 날짜가 다가올 수록 마음은 조급해졌다. 이제는 정말 헤어져야 할 때다. 마음이고 물건이고 정리를 해야만 한다. 그렇게 미루고 미루다 하루 전 날에서야 부랴부랴 정리를 하고 인사를 했다. 안녕, 잘 있어. 다시 올 게 고마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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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남아있는 자일 줄만 알았던 나는, 이제는 떠나는 자가 되어 나에게도 과거가 된 그 곳을 추억한다. 아름다운 기억을 남겨준 그 곳에 감사한다. 이제 과거를 그리워하고 아쉬워하는 것은 그만하고 현재를 살아가자. 인생은 생 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져 때로는 불안하고 두렵지만 그렇기에 재미나다고 하지 않는가. 어찌되었든 살아있으니 그 걸로 되었다. 내가 생각했던 미래는 아니지만 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어떤 만남이 날 기다리고 있을지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