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월 1일에 새해는 2월부터 시작이라고 선언했다. 새해를 두 번이나 연기할 수는 없으므로 쓴다. (블로그 이름이 틈틈튼튼에서 최하나닷컴이 된 것은, 어쩌다 도메인을 뺏겼는데 더 좋은 게 생각이 안 나서 그렇다. 나도 그렇게 자랑스럽지는 않다.)

식생활

조너선 사프란 포어는 고등학생 때 제일 좋아하던 작가 중 한 명인데 자주 가는 서점 있던 신간이 눈에 띄었다. 눈에 띄는 표지였고 해답이 있다면 뭔지 알고 싶었던 질문이라서 읽었다. “지구와 인류를 살리고 싶다면 고기 좀 덜 먹자”는 이야기를 가장 흥미롭고 절박하게 하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하여튼 그래서 채식을 지향하는 생활을 처음으로 시작했다. 그러면서 깨달은 것은, 머리보다 몸을 설득하는 일이 더 쉽고 강력하다는 점이다. 당위와 죄책감이 실천으로 이어지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데 그냥 단순하게 마음 먹고 습관을 바꿔보니까 몸이 금방 오케이한 것 같다. 어쩌면 나도 내 욕구를 오해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고. 아무튼 그래서 욕구와 선호가 많이 바뀌었다. 한참 운동 할 때는 서리태콩과 헴프씨드를 광적으로 많이 먹었다.

여행과 방문

4월의 제주와 10월의 강릉이 있었다. 일 때문에 광주, 익산, 부산에도 잠깐씩 들렀다. 어느 도시에서건 기억에 남는 만족스러운 시간은 대체로 장인 정신에 관해서다. 검색해서 나오는 별점이나 리뷰의 수로 도드라지지 않는, 우연히 발과 눈이 가는대로 들른 가게에서 고유하고 진실되고 언제 와도 똑같이 감탄스러울 신념 같은 것을 마주하곤 했다. 분식집 같은 인테리어를 한 가게에서 내려준 핸드드립 커피랄지, 사막의 모래알 같은 헌책더미 사이에 자기만의 지도가 있는 사람이 숨겨둔 보물을 꺼내올 때의 표정이랄지, 그런 걸 발견할 때 나만의 명예의 전당이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새 시나리오를 다 쓰고 나서 이 일은 계속 해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취미나 부업이 아니고 일이니까, 쓰는 것 자체가 너무 즐겁고 행복할 수는 없다. 그런데 그걸 잘 해내고 나서 느끼는 충일감은 다른 것으로 대체가 안 된다. 일에 대한 확신은 그런 데서 찾아지기도 하는 것 같다. 일시적이더라도.

취미

초봄에 고스트 월드와 우주전쟁이 섞인 꿈을 꿔서, 만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제목은 ‘도사와 군자'로, 도사와 군자라는 여자애들과 도사의 할머니, 호걸이 주인공이다. 한참 시도해봤는데 만화는 도저히 못 그리겠다. 이야기만 쓰고 나중에 누구한테 맡겨야할 것 같다. 말과활에서 하는 글쓰기 수업에서 재밌는 책을 많이 읽었고 덕분에 숙제로 단편 소설도 하나 썼다. 마음에 드는지는 모르겠는데 뭔가 해소는 됐다. 초우상회에서는 새 책을 준비 중이다. 봄 쯤에 나온다. 아 팟캐스트도 했지.

두목

9월에 두목이 왔다. 실은 두목이가 오기 전의 시간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강아지와의 삶이란 원래의 삶에 강아지가 1마리 늘어나는 게 아니라 전혀 다른 삶으로 송두리째 바뀌는 일이라는 것을 몰랐다. 강아지의 후각은 인간보다 1만배나 더 뛰어나다. 요즘은 어떤 냄새가 나면, 내가 맡는 이 냄새가 두목에게는 얼마나 더 진하게 느껴질지를 생각하게 된다.

본 것

올해의 영화를 꼽는 것은 어렵다. 연말에 좋은 영화들이 많이 개봉했는데 개랑 노느라고 극장에 거의 가지 못했다. 핑계처럼 들리겠지만, 보고 싶은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이 집에서 왕복 2시간 거리에 있는데 5시간마다 야외 배변을 해야하는 강아지와 함께 산다면, 그것도 러닝타임이 2시간 넘는 영화라면 극장 다녀오기는 정말 어려운 미션이다. 본 것 중에만 꼽자면 연초에 본 <북스마트>와 연말에 본 <매트릭스 리저렉션>. <매트릭스 리저렉션>은, 원작자가 자기 손을 떠난 원작을 속편에서 어떻게 다루고 어떻게 새로운 서사를 쟁취하는지에 대한 가장 흥미로운 사례라고 생각한다. 방구석 감상 부문으로는, 코미디 영화 팟캐스트 하다 보니까 코미디로부터 멀어지고 싶어져서 어두운 영화를 많이 봤다. 그 중에서도 두기봉 영화를 가장 열성적으로 봤다. 올해의 시리즈는 <더 체어>와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 <더 체어>는 최근에 본 가장 세련되고 사려깊은 코미디였다. 자기연민이 아닌 자조와 정신승리가 아닌 낙관을 끌어낸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과제인가. 그걸 말끔하게 해내는 시리즈를 봐서 고무적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는, 어느 언론사에서 <하우스 오브 카드>, <지정생존자>와 비교하며 아쉽다고 써놓은 단평을 봤는데, 그마저도 <이상청> 세계의 스쳐 지나가는 인서트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