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연말결산 때 29세의 마지막을 보내면서 비장하게 뭐라고 적었는데 빠른 생일인데다 만 나이로 계산해서 모두들 나를 여전히 이십대로 대했다. 그러다보니 또 이십대로 살았고 그러면서 1년이 지났더니 이제 그냥 빨리 사십대가 되고 싶을 뿐 한 살 더 먹은 건 뭐 어쩌라고 싶다. 아무튼 2021년을 맞아 이 블로그의 명맥을 이어가는 유일한 글인 연말 결산의 시간을 갖도록 하겠다. 2021년 연초에 쓰고 있지만 편의상 2020을 '올해'라고 써버렸는데 그냥 놔두기로 한다.

내 직업과 영화는 판데믹에 큰 타격을 입었으나, 영화 개봉을 앞둔 11월 전 까지는 어린이 시절 이래 가장 건강한 시간을 보냈다. 평소에도 웬만해선 집 밖에 나가지 않는 편인데다 전염병이 아니더라도 외출이 힘든 곳에 살기로 마음 먹고 이 집을 골랐기 때문에 거리두기가 내 심신을 괴롭힌 일은 딱히 없었다. 칩거하면서 읽고 쓰기만 해야지 하는 결심으로 이사를 와놓고 작년에는 영화 촬영 때문에 집에 머문 시간이 길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올해야말로 이 집과 돈독한 애정을 나누기에 적절했다. 특히나 거리두기가 강화된 시기에 가장 열성적으로 공부하고 다독하고 영화도 제일 많이 봤다. 책장도 새로 들이고 식물도 정성껏 돌보면서 집에 머무는 행복을 많이 누렸다.

사람

작년과 같이 준 것보다 받은 것이 더 크고 작년과 달리 미움보다 사랑을 더 많이 받았다. 사람으로 인한 지옥같은 스트레스도 있었지만 <보건교사 안은영>에서 안은영이 절이나 남산타워의 자물쇠로부터 좋은 에너지를 충전하듯이 나도 좋은 사람들의 좋은 기운으로 금방 회복했다. 언젠가 말했듯 영화가 병도 주지만 보약이 되기도 한다. 아직 곁에 남아있는 오래된 친구들과 새로 생긴 뜻이 맞는 동료들 덕분이다. 초여름인가, 저녁에 친구와 타코를 먹고 한강까지 걷는데 비오기 직전의 축축한 공기 속에서 '만나면 반드시 즐거운 사람들'이라는 문장이 떠올랐다. 그런 순간들이 인류가 싫어질 때를 대비해서 간직해야할 상비약이다. 아무튼 올해는 성정과 달리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낯선 의지가 생겼다.

거의 처음으로 과학도서를 열심히 읽게 된 게 특기할만한 사항이다. 우연히 읽게 된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라는 물리학 책이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양자역학이 뭐냐고 물으면 한 마디도 제대로 말할 수 없다. 그렇지만 이게 다 무슨 소용인지 묻지 않고 이 세계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알아내려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그들이 밝혀낸 비밀들이 시처럼 아름다웠으니 그걸로 충분하다. 이 책 덕에 흥미가 생겨서 과학관련 도서를 연달아 읽었다. 그 중에서 빌 브라이슨의 [거의 모든 것의 역사]는 무인도에 가져갈 단 한 권의 책으로 잠정 선정되었다. 올해 출간된 책은 곽재식의 [괴물 과학 안내서] 뿐이고 방학 맞은 9세 아동처럼 신나게 읽었다(내 수준에 가장 잘 맞았다).

영화(본 것)

작년보다 더 영화 볼 정신이 없었다. 쉬는 동안은 스필버그랑 소더버그 영화를 많이 봤다. 연말에 벼락치기로 올해 개봉작들을 몰아 봤다. 그럼에도 올해의 영화는 별로 감이 안온다. 올해의 한국 영화는 <소리도 없이>다. 올해의 캐릭터는 김토일이다. 올해의 영화가 애비규환이 될 수는 없어도 올해의 캐릭터는 정수정의 김토일이다. 분명히 말한다. 정수정의 김토일이 2020년의 얼굴이고 올해의 인물이다. 나에게 돌을 던져도 좋다 그렇지만 김토일만은 잊지 말아주기 바란다. 그리고 올해 집에서 본 영화들 중에 이 시국에 적절하다고 느낀 영화는 <마션>과 스필버그의 <우주전쟁>이다. 역사상 치명적인 역병의 바이러스들은 난데없이 나타나서 기승을 부리다가 또 예상치 못한 때에 갑자기 사라졌고 그 이유를 아직도 모른다고 한다(빌 브라이슨 책에서 읽었다). 그런 의미에서 <우주전쟁>의 엔딩을 생각하면 마음이 좀 편해지는 게 있다.

영화(개봉한 것)

얼마전에 나름의 마무리 글을 올렸으므로 넘어가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