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어지는 눈과 깊어지는 귀

이훤 시인 ∙ 사진가


#손톱의속도 #꽁무니 #낯선나라 #조용한애 #나의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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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손톱의 속도로 자라요. 타국에 떨어진 자는 알게 됩니다. 생각이 말을 따라가지 못하는 동안 언어의 꽁무니만 봅니다. 얼마간 말을 따라다니는 습관이 생기고요. 잡으려 하면 도망가는 그 꼬리를요.

타국에서는 모두 조금씩 다르게 말하는 사람이 됩니다. 몸이 움직이는 방식도 달라집니다. 별안간 등을 구부리고 보폭이 좁아지고 자주 사과합니다. 낯선 눈빛이 쌓입니다. 그 지역에서만 가능한 하나의 몸을 더 갖게 됩니다. 집에서 짓던 표정과 새로 발명한 얼굴들이 그 시절을 지나는 동안 찰흙처럼 뒤섞입니다. 집이 무엇이었는지, 거울 앞에서 자신의 원형이 무엇이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었더라. 나는 어떻게 말하는 인간이었더라.

언어는 나의 땅이었습니다. 언어가 집이고 태도고 입장이었습니다. 모국어가 사라진 곳에서 나는 모든 단어를 처음 밟아보는 지대처럼 조심히 오르내렸습니다. 같은 구간에서 넘어졌고요. 입술을 꽉 깨물어도 길을 잃었습니다. 내려오는 길에는 스스로를 나무랍니다. 또 틀렸어. 너는 충분하지 않아. 타인에게 하지 않을 못된 말을 하면서. 자기 지역을 처음 점유하는 자는 모질어집니다. 딛기 전에 닿는 곳은 자신 뿐이어서.

낯선 나라의 말이 스밉니다. 더디게. 예고 없이.

이주한 뒤 육 개월 동안 거의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틀리는 게 부끄러워 완전한 문장으로 말하기를 기다렸습니다. 밖에서 하고 싶었던 말을 기억해 두었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사전에서 찾았습니다. 그제야 입 밖으로 꺼냈습니다. 주로 혼자 말하고 그걸 들었습니다. 학우들은 나를 조용한 애라고 했습니다. 거기까지가 내 지역이었습니다. 말하기로 하는 순간까지, 말이 닿는 데까지만 내 땅이었어요. 나의 지도는 비좁았습니다. 조용한 애는 점유의 의지가 생겨났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우스꽝스러워져도 소리 내어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뜬금없는 조합으로 문장을 만들면 누군가 폭소했지만 상관없었습니다. 맥락이 맞지 않는 말을 이후로도 많이 했습니다. 더는 상관없었습니다. 어차피 우리 모두 어딘가 조금씩 어긋난 말들을 수납하는 함일 뿐이니까.

같은 단어를 여러 번 다르게 말하다 보면 어떻게 말하고 싶은지 알게 됩니다. 선택하려면 충분히 끄집어내고 소리치고 버려봐야 합니다. 발음해 본 낱말들, 모음과 자음을 뒤집어 읽은 시간이 서서히, 내가 가진 언어를 뒤집습니다. 언어가 나의 지역을 갈아엎습니다. 어디까지 차지하고 싶니? 다시 내가 선 땅을 톺아봅니다.

손톱이 자라는 속도로 나의 언어를 모읍니다. 언어가 생기니, 그것을 둘러싼 얼굴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조금 더 믿게 됩니다. 우린 각자가 겪어온 지형의 총합입니다.

5월 20일 무대에 오른 연극 <엔들링스>도 비슷한 대상을 다룹니다. 나의 말. 나의 지도. 나의 반경. 차지했거나 잃어버린 우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 모든 획득과 소실은 이동하는 자를 따라 움직입니다. 이주에 지쳤지만 여전히 영향받고 싶은 나는 좋은 이야기를 찾아 움직입니다. <엔들링스>는 그런 작품 중 하나이고요. 연극을 보다 말고 관객들은 아리송해질 겁니다. 각 인물이 차지했거나 오래 욕망해온 땅으로 이동하며 어디선가 길 잃을 겁니다. 그리고 그 사이를 헤치며 자신이 점유해온 시공간을 재편성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오래 이주해온 자들의 눈이 넓어지듯. 먼 타인을 들여본 적 있는 사람의 귀가 깊어지듯.

무언가 쫓는 사람들이 극장으로 모입니다. 땅과 땅 사이에서 우리가 모르는 음성이 들립니다. 우리는 그것을 따라 합니다. 따라 하다 보면 그 위에 있습니다. 말 위로 올라섭니다. 땅이 모입니다. 말은 우리의 극장. 극장은 우리 각자가 몸으로 모아온 땅. 자신이 선 자리에서 최후를 향하는 사람들은 닮은 데가 있습니다.

천장만큼 많은 얼굴이 쌓인 극장에서 손톱이 자랍니다. 꽁무니를 밟을 준비된 자들이 자신의 나라를 만들러 나섭니다. 서로의 대륙에 들어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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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훤(시인 ∙ 사진가)

정지된 장면을 잇고 모국어를 새삼스러워하는 사람. 시집 『양눈잡이』 『우리 너무 절박해지지 말아요』 등과 시산문집 『청년이 시를 믿게 하였다』를, 산문집 『고상하고 천박하게』(공저) 『눈에 덜 띄는』 『아무튼, 당근마켓』 등 여덟 권의 책을 쓰고 찍었다. 분절과 유격, 연결에 관심이 많다. 「We Meet in the Past Tense」 등의 전시와 『정확한 사랑의 실험』 『벨 자』 『끝내주는 인생』 등의 출판물에 사진으로 함께했다. 사진관 <작업실 두눈>을 운영한다. 아침마다 잡초 뽑고 고양이 똥을 치운다. 아내의 소설을 번역 중이다. 연극 <엔들링스>에 배우로 참여 중이다.

PoetHwon.com @__leeh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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