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심하시는 하나님 (창6:4-6)

덴마크의 동화작가 안데르센은 「인어공주」, 「미운 오리 새끼」 등 주옥같은 작품들을 많이 남겼습니다. 그중에 「눈의 여왕」이라는 작품도 있습니다. 이 책은 눈물과 사랑의 의미를 잘 표현하고 드러내 주는 작품입니다.

책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트롤이라는 악마가 있는데, 이 악마는 아주 특별한 거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거울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비추지 않고 왜곡해서 비춥니다. 흉측하게 보이게 하고, 삐딱하게 보이게 합니다. 어느 날 악마 트롤은 이 거울을 가지고 천사들을 골탕 먹이려고 하늘로 올라가는 중이었습니다. 부주의하게 장난 치다가 그만 거울을 깨뜨렸고, 유리 조각 파편이 산산조각 나서 지상에 있는 사람들의 심장과 눈에 박힙니다.

거울 파편이 심장에 박힌 사람은 인간으로서의 온기를 상실합니다. 차갑게 변했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바뀌고 변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아주 차갑게 변했습니다. 눈에 그 유리 조각 파편이 박힌 사람은 사람을 왜곡해서 보고 사물도 이상하게 보게 됩니다. 어느 마을에 살던 카이라는 소년의 심장과 눈에도 유리 조각 파편이 박혔습니다. 카이에게는 게르다라고 하는 아주 친한 친구가 있었는데, 둘은 둘도 없는 친구였습니다. 그런데 유리 조각 파편이 카이의 심장과 눈에 박힌 이후로 사람이 달라졌습니다. 이유 없이 트집 잡고, 이유 없이 게르다를 멀리하고 미워합니다.

영문을 알 수 없었던 게르다는 카이에게 서운함을 느끼고, 두 사람은 갈수록 서먹한 사이가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눈의 여왕이 카이를 찾아와서 기억을 잊게 하는 입맞춤을 하고 눈의 여왕의 왕국으로 데려갑니다. "네가 여기를 벗어나고 기억을 찾으려면 내가 내준 얼음 조각 퍼즐을 풀어야 한다." 얼음 조각 퍼즐 퀴즈를 냅니다. 하지만 카이는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그 퍼즐을 풀 수가 없습니다. 고민하고 고민했지만 할 수 없어서 혼자 얼어붙은 강가에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한편 게르다는 카이가 갑자기 없어지자 놀라서 카이를 찾아다닙니다. 이리저리 수소문하며 천신만고 끝에 카이를 찾아서 눈의 여왕의 왕국에 도착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얼어붙은 강가에 우두커니 서 있는 카이를 보고 게르다가 달려가서 끌어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립니다. 게르다의 눈물이 카이의 심장에 흘러내릴 때 카이의 심장에 박혀 있던 유리 조각 파편이 녹아내립니다. 그제야 카이가 따뜻함을 회복하고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옵니다. 자기를 찾아서 여기까지 온 게르다가 고마워서 카이도 눈물을 쏟아냅니다. 그러자 그의 눈에 박혀 있던 유리 조각 파편도 녹아내립니다.

안데르센이 이 동화를 통해서 들려주고자 하는 것은 눈물과 사랑의 힘입니다. 세상에 눈의 여왕처럼 권세를 가진 자들, 악마 트롤처럼 세상을 좌지우지하고 장난치는 자들, 그들을 맞서서 이길 수 있는 것은 사랑과 눈물밖에 없다는 것을 1845년에 이 작품을 통해서 보여주었습니다.

사람의 눈물과 사람의 사랑이 이토록 강렬하다면, 예수님의 눈물은 어느 정도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세 번 우셨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죽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사망 권세에 매여 있는 사람들을 통분히 여기시고 쏟아내신 눈물, 곧 멸망당할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흘리신 긍휼의 눈물,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앞두고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흘리신 눈물―예수님의 그 뜨거운 눈물이 오늘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눈물이 아니었다면, 예수님의 뜨거운 사랑의 눈물과 분노의 눈물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누구도 구원 얻는 백성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에는 하나님의 근심이 나옵니다. 근심하시는 하나님, 고통 가운데 계신 하나님, 그리고 그 고통과 근심 때문에 눈물 짓는 하나님, 그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이 오늘 우리에게 다가오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나는 과연 하나님의 근심거리인가,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가를 말씀에 비추어 보시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말씀을 통해 결단하고 깨닫는 은혜의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 용사와 명성의 시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에 취했습니다.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약함보다 강함을 추구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보다 자기 중심적인 삶을 추구하고, 하나님 나라를 갈망하는 것보다 인간의 나라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이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그들은 거침없이 빠져들어 갑니다. 예배 공동체를 떠났습니다. 세속화되었습니다. 세상과 동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만들어낸 삶의 결과, 그 후손들의 비참함을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4절을 보십시오.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의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

하나님의 아들들이 예배 공동체를 떠나 세속화되고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에 취해서 그들과 결혼합니다. 세상에 거룩이란 존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구별된 삶, 하나님의 백성들이기 때문에 이렇게 살아야 된다는 것, 그것은 전혀 딴 나라 세상 이야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결혼하고 자식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4절 말씀에서 살펴보아야 할 중요한 두 단어가 있는데, 용사라는 단어와 명성이라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용사라는 단어를 보면 라멕을 떠올립니다. 라멕은 가인의 후손입니다.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예배 없이 하나님 없이 신앙 교육과 훈련 없이 살아가는 자들에게 힘이 최고의 능력이고 강한 것이 곧 미덕이 되는 세상, 그 세상에서 가장 강한 자로 군림한 사람이 라멕이었습니다.

라멕은 두 아내를 불러 놓고 자신이 사람을 죽이고 살해한 것을 자랑합니다. 창세기 4장 23절입니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살인을 정당화하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것이 가인의 후손들의 삶의 질서였습니다. 가장 강한 자가 대우받는 세상, 가장 강한 자가 우대받고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세상, 가장 강한 자 라멕이 자신의 상처 때문에 소년과 사람을 죽이기를 서슴지 않는 사람―그런 사람을 세련되게 일컫는 단어가 용사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가인의 후손들에게 용사들은 라멕 한 사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여러 사람들이 용사였습니다. 그 용사라면 용사 중에 용사, 용사들이 추구하고 갈망하는 것은 명성입니다. 용사로서 최고의 이름을 내고, 용사로서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명성을 얻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왜 그들이 명성을 원했을까요? 수금과 퉁소를 부는 사람들이 용사로서 최고의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 명성을 얻은 사람 앞에 와서 그의 이름을 높이고 찬양하며 기뻐하며 "당신이야말로 가장 강한 사람 중에 강한 자입니다" 이렇게 불러주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래서 용사가 되고 명성을 얻고 사람들에게 이름을 알리고, 사람들이 그 앞에 와서 노래 부르고 그 이름을 높여 주기를 갈망했습니다. 이것은 중독성이 있습니다. 여기에 도취되면 빠져나오기가 어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