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약 1:22)
오늘은 야고보서 공부 두 번째 시간입니다. 제목은 '경건과 믿음에 대하여'입니다. 경건과 믿음이라는 이 주제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일단 나 자신에 비추어 생각해 보면 '나는 경건한데', '나는 믿음이 그래도 꽤 있는데' 하는 생각을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보다도 경건과 믿음은 사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할 때 정적인 느낌이 강합니다. 동적인 의미보다는 정적인 느낌입니다.
경건이라고 하면 가만히 앉아서 성경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는 것을 떠올립니다. 믿음이라고 하면 내가 믿음 있는 것을 상대방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나도 저 사람이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믿음도 내적인 것이고 정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야고보 사도는 경건과 믿음을 정적인 것으로 국한시키지 않고 표현하고 행동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사실 야고보 사도가 이 야고보서를 쓸 때의 시대적 상황과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적 상황이 굉장히 유사합니다. 제가 그 때문에 이번 학기에 야고보서와 베드로전후서를 택했습니다. 당시 야고보와 베드로 사도가 활동하던 시대에 이 편지를 쓸 때, 그때는 기독교가 공인되기 전이었습니다. 그 말은 예수 믿는다는 것을 공공연히 나타내면 목숨이 위태로운 시대였다는 뜻입니다. 잡혀가면 사자굴에 던져질 수도 있고 모진 고문을 받기 쉬운 그런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모여서 성경공부하고 예배드리고 말씀 공부하는 것, 여기까지가 신앙생활의 한계였습니다. 정말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들키면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데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의 삶이 그냥 듣고 끝나는 것이었습니다. 예배드리고 그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나가서 실천하고 전도하고, 예수 믿는 사람의 삶을 빛과 소금의 삶으로 살아내는 것은 굉장히 약한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감히 야고보와 베드로 사도는 '살아가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바꾸면 예수 믿는 것을 이야기하고 드러내고, 그러다가 죽어도 좋으니 그렇게 해서 천국을 살아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와 왜 닮아 있느냐 하면, 우리는 여러 어려운 상황들을 겪으면서 겨우 예배 정도 드리고 있습니다. 그나마 몸을 움직이고, 그나마 실천하고 봉사하고 활동했던 것들도 끊어지고 숨이 죽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 정도 해도 괜찮고 잘한다'고 생각하는 그런 시대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야고보서와 베드로전후서를 읽으면서, 그 옛날 이 편지를 받았던 그 시절 살아갔던 우리 믿음의 선진들이 어떤 도전을 받았겠는가 생각해 봅니다. 이 편지를 받고 그대로 행동하면, 나가면 죽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다고 죽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런 의미에서 경건과 믿음은 내적이고 정적인 개념이 아니라 외적이고 동적인 의미입니다. 그것을 오늘 말씀을 통해서 확인해 볼 것입니다.
먼저 야고보 사도가 굉장히 조직적인 분인데, 17절에 보면 하나님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라고 표현했습니다. 좋은 것을 표현할 때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받고 싶지 않습니까? 온전한 선물, 온갖 좋은 것 받고 싶습니다. 일단은 선물세트입니다. 그게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표현을 안 해도 받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 출처가 어디에서부터 온다고 했습니까? 위에서부터입니다. 그 위는 누구입니까?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온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일단 이 선물을 받으려면 우리 시선이 위를 향해 있어야 합니다. 땅을 보고 있어서는 온갖 좋은 것과 온전한 선물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시선이 땅만 보고 고개를 처박고 살아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우선 하늘을 보고 우리 시선을 위를 향해 있어야 하나님이 위에서 부어 주시는 선물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야고보가 가장 먼저 한 말이 아닙니다. 구약 시대부터 시작해서 성경 전체를 흘러내려오는 하나의 시대적 정신입니다.
출애굽기 16장 4절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안 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이 '하늘에서'라는 말씀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를 몇 년 동안 먹었습니까? 40년을 먹었습니다. 자그마치 넉 달이 아니고 4년이 아니고 40년을 먹었는데, 그것을 매일 먹었습니다. 안식일 전날에는 이틀 치를 거두었으니까 어쨌든 40년 동안 매일 들판에 나가서 만나를 기다리고 거두어 온 것입니다. 그런데 만나가 하늘에서 내렸습니다. 만나를 받으려면 하늘을 봐야 만나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것을 40년 동안 지독하게 지겹게 반복시켰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먹을 것을 내려 준다는 것을 훈련하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희에게 먹을 것을 준다.' 단순합니다. 단순한데 인간이 미련해서 이 단순한 것을 받아들이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430년 동안 땅만 파고 살았습니다.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았습니다. 먹을 것을 바로가 준다고 생각했습니다. 노동하고 노예로 살면 바로가 먹을 것을 주고, 열심히 노동하면 저녁이 되면 먹을 것이 쌓여 있고, 그래서 먹을 것이 땅에서 나온다고 생각했고, 내 근육에서 나온다고 생각했고, 내 수고와 내 노력에서부터 나온다고 생각했는데, 이것을 교정하는 데 40년이 걸렸습니다.
자그마치 그렇다고 이 40년 동안 교정해서 진짜 제대로 교정이 됐습니까? 안 됐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자마자 다시 원위치가 되었습니다.
야고보가 하나님을 설명하면서 하시는 말씀이 '온갖 좋은 것과 온전한 선물은 위에서부터 내려온다, 하나님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늘을 봐야 되는 것입니다. 바울도 그런 맥락으로 설명합니다. 골로새서 3장 1-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에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위의 것을 찾으라, 하나님이 위에서부터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은 그러면 맨날 하늘만 보고 삽니까? 땅에 우리 식구들도 있고 일터도 있고 그런데 이것은 어떻게 하라는 이야기입니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선순위입니다. 우리 시선이 먼저 하나님께 향해 있어야 그다음 것이 해결된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지혜입니다. 나를 먹이고 살리고 입히고 돌보시는 분, 복의 근원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을 다윗이 알았습니다.
시편 16편 2절입니다.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다윗의 시편입니다. 다윗이 시편 16편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복을 주시는 이야기를 뒤에 합니다. 그런데 그 첫 번째로, 그 첫 번째 일성으로 하는 것이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복의 근원이십니다. 다윗이 왕이 됩니다. 이 나라를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부귀영화와 권세를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복의 근원이 하나님이신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을 인지하고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