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고린도전서 2장과 3장을 본문으로 두 번째 시간을 공부하겠습니다. 오늘 공부할 내용의 제목이 '하나님의 지혜와 교회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교회 공동체, 별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 교회 공동체에 꼭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오늘 공부의 절반은 하신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지혜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지혜가 귀한 겁니까, 별볼일 없는 겁니까? 귀한 것이지요. 정말입니까? 돈보다 더요? 진심이십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지혜가 돈보다, 권력보다, 우리가 정말 소중하게 여기는 것보다 더 귀중하고 값진 것이라면, 발견하기 쉽겠습니까, 발견하기 어렵겠습니까? 그냥 지나가면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살펴볼 내용을 보면 '숨겨져 있다'고 했습니다. 숨겨져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이 하나님의 지혜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기도도 필요하고 말씀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지혜를 기도와 말씀으로 발견하면 교회 공동체가 거룩하고 행복해집니다. 이것이 결론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제목을 잘 이해하시고 그 내용을 보겠습니다. 2장과 3장 내용을 함께 봅니다.
첫 번째 질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전도하기 시작한 초창기를 어떻게 회고합니까? 1절에 보니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즉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개척할 당시를 회고하고 있습니다. 그때 어떤 마음가짐이었는가 하면,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까닭이 있습니다.
2절에 보니 그가 붙잡은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이 말은 결심했다는 말이지요. 왜 이랬습니까?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에 오기 전에 바울이 아테네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아테네에서 철저하게 실패했습니다. 그 경험 때문에 본인이 고린도에 와서는 십자가만 전하겠다고 결심한 것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렇게 알고 있지요. 십자가에 무엇이 있습니까? 십자가에 구원이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 구원은 어디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죄로부터의 구원이고,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그러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분이 누구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죄로부터도 구원받고, 죽음으로부터도 구원받았습니다. 사실은 내가 그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하는데 나 대신 예수께서 달리셨기 때문에 내 죄를 대신 지셨습니다. 그래서 죄로부터 구원받았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달려서 죽은 것으로 끝나지 않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려가셨다가 삼일 만에 부활하셨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죽음으로부터도 구원받았습니다. 이 십자가가 기독교 복음의 핵심입니다. 구원이 핵심입니다. 즉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받은 것, 여기서부터 시작해서 계속 가지를 쳐 나가는 것이 기독교이고 그것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죄를 이야기하지 않으면, 교회가 십자가를 얘기하지 않으면, 교회가 부활을 얘기하지 않으면, 그것을 교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것이 핵심인데, 그것이 본질인데, 교회가 매일 '복 받으라, 복 받으라', 교회가 매일 '부자 되세요, 부자 되세요' 한다면 그것이 무슨 복음입니까? 그것은 세상에 나가도 얼마든지 얘기하고 있는데, 서점에만 가도 서점에 깔려 있는 것이 전부 다 처세에 대한 것이고 돈벌이 수단에 대한 것인데,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에 와서 이야기하는 수많은 간증들, 교회에서 내뱉는 목회자들의 수많은 설교들이 십자가를 얘기하지 않고 죄와 죽음을 얘기하지 않는데, 그것을 어떻게 교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교회가 아닙니다. 사이비 사교 집단이지, 결단코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그래서 이 본질, 이 핵심, 이것이 정말 교회의 본질이요 핵심입니다. 이것을 놓치면 교회는 그냥 없는 것이 낫습니다. 차라리 죄짓느니 차라리 자폭하고 마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바울이 "나는 십자가 외에는 어떤 것도 전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냥 관념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전하다가 실패해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7장의 이야기를 보십시오. "바울이 아테네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라고 했습니다. 이 '격분'이 중요합니다. 전도할 때 분노를 가지고 전도하는 것이 옳습니까, 긍휼한 마음을 가지고 전도하는 것이 옳습니까? 긍휼해야 합니다. 바울이 실패한 원인, 가장 중요한 원인이 이것 때문입니다. 분노한 것입니다. 마음이 막 끓어오르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분노와 헷갈리면 곤란합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분노, 그 바탕에는 긍휼이 있습니다. 사랑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격분한 것입니다. 화가 난 것입니다. 사람이 화를 내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합니다. 화를 내면 평정심이 무너지고 말이나 생각이 함부로 막 나갑니다. 나중에 후회하지만 소용없습니다. 이미 격분했기 때문입니다. 복음 전할 때 그 시작이 격분으로부터 시작한 것입니다.
그 다음을 보십시오. 어떻게 변론하는지 살펴봅니다.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라고 했습니다. 마음이 복음 전하는데 격분한 것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변론을 하는 것입니다. 변론이 무엇입니까? 주장하는 것입니다. 자기 주장을 가르치려 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전도할 때 그분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으면 가르치려 듭니까, 아니면 기도합니까? 기도하게 되지요. 그런데 바울은 자꾸 변론하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똑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르쳐도 안 먹힙니다. 자기만 잘났습니까? 아테네가 전부 다 철학자들인데, 여기에 전부 다 철학자들이요 소피스트들인데요.
18절에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학파 사람들도"라고 했습니다. 에피쿠로스 학파, 스토아 학파, 소피스트의 두 부류가 있습니다. 금욕주의자들인 스토아 학파, 쾌락주의자들인 에피쿠로스 학파, 이 두 부류가 있습니다. 이들과 지금 무엇을 합니까? 아까 변론하다가 이제는 어떻게 됩니까? 쟁론으로 바뀝니다. 쟁론은 '공격하다'라는 뜻입니다. 이제는 공격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토론하다가, 변론은 토론이거든요, 서로 토론하다가 그 다음에는 공격이 막 들어가는 것입니다. 왜요? 격분했기 때문입니다.
긍휼한 마음을 가지면 공격할 수 있습니까? "아, 지금은 때가 아닌가 보다. 나는 전하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서자"라고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화내면서 시작하니까 변론하다가 그 다음에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사람들이 어떻게 말합니까?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라고 합니다. 말쟁이라고 해버립니다. "말은 잘하네, 말은 잘하네." 왜 그렇습니까? 공격을 하기 시작하니까 그렇습니다. 바울이 얼마나 말을 잘하고 논리적이고 똑똑합니까? 다른 사람들의 입을 다물게 하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은혜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이 말쟁이가"라고 하는 것이지요. 철저하게 실패하는 것입니다.
열매가 어떻게 됩니까? 그 다음 34절을 한번 보십시오.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라고 했습니다. '몇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단 한 영혼이라도 중요합니다. 단 한 영혼이라도 소중하고, 구원받았다는 자체가 너무나 귀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지금 급합니다. 지금까지 바울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능력, 지금까지 바울이 하나님의 손에 사로잡혀서 열심히 복음 전하고 놀라운 능력을 행한 것에 비하면 '몇 사람', 이것은 복음 전도의 실패입니다. 긍휼한 마음을 가지고 철저하게 기도하고 열심히 전도해서 몇 사람이라면 이것은 귀한 열매입니다. 그런데 격분하고 변론하다가 공격하고 쟁론해서 사람들에게 비아냥거림을 받은 것입니다. "이 말쟁이가!" 그래서 몇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바울이 그 비참함을 안고 고린도로 온 것입니다. "그 후에 바울이 아테네를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9장 13절을 한번 봅시다. 우리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전도하러 왔다는 말 아닙니까? 예수님이 전도하실 때 어떻게 하신다고요? 긍휼을 구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에 영혼을 사랑하고 이 사람을 전도해야 되겠다는 마음이 있으면 긍휼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그 긍휼한 마음은 가지고 싶다고 가져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기도해야 합니다. 참 신비로운 것이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르고 그 사람을 놓고 기도하기 시작하면 그분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이것은 정말 희한한 것인데, 비밀입니다. 왜냐하면 경험한 사람만이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제가 이렇게 얘기해도 그렇게 해보지 않으면 알 수가 없습니다. 그분을 위해서 기도하면 그분의 마음이 느껴지고, 그분의 상황이 느껴지고, 그분이 지금 처절하게 투쟁하고 있으니 성령께서 도우셔야 된다는 마음이 느껴집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긍휼한 마음을 주십니다.
긍휼한 마음이 있는데 어떻게 공격합니까? 함부로 어떻게 변론합니까? 가르치려 듭니까? 품어주게 되고, 기다려 주게 되고,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밥이라도 한 그릇 대접하고 손 한번 꼭 붙잡아 주게 됩니다. 백 마디 말은 아무 소용없습니다. 전도가 안 됩니다. 그렇게 해서 바울이 그것을 깨닫고 고린도로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