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2장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를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오늘은 갈라디아서 2장 말씀을 함께 나눕니다. 갈라디아서 1장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여러 가지를 보고 또 배웠습니다. 갈라디아라는 곳은 하나의 도시가 아니라 지역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북부 갈라디아가 있고 또 남부 갈라디아가 있는데, 남부 갈라디아의 네 도시를 갈라디아 지역 벨트라고 합니다. 네 도시가 어디인지 기억나십니까? 비시디아 안디옥, 루스드라, 이고니온, 더베입니다. 이 네 도시를 갈라디아 벨트라고 하고, 바울과 바나바가 이곳을 1차 선교 여행 때 가서 개척했습니다. 사실 첫사랑의 지역이 바울에게는 아주 강렬하게 남아 있었기에 2차 선교 때도 갔었고 3차 선교 때도 그곳을 방문합니다. 그만큼 바울은 이 갈라디아 지역 교회들을 굉장히 아끼고 사랑했고, 동시에 갓난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어린아이들처럼 이 복음 안에서 자라야 되는데 오염된 자가 되면 안 된다는 간절함과 애통함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난 1장에서 우리가 본 것처럼 바울이 지금 고린도에서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서 편지를 쓰고 있는데, 편지를 쓰면서 감사도 생략할 정도로 아주 긴박하게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른 복음 때문입니다. 다른 복음이 있다는 뜻이 아니고, 복음을 가지고 장난치는 사람들, 복음을 물타기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구원이라고 하는 건 한 가지로밖에 얻을 수가 없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주로 고백함으로 얻는 것이 구원의 유일한 조건입니다. 그런데 그것 말고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것은 물론이고, 거기에다가 무엇인가를 더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할례였습니다. 사실 할례라는 것은 받아도 그만이고 받지 않아도 그만인데, 바울이 할례에 이렇게 목숨을 거는 이유는 유대인들이 이것을 구원과 연결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자기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났지 않습니까? 그 후에 우리는 바울의 행적에 대해서 좀 모호하게 잘 알지 못했는데, 바울이 바로 예루살렘에 가서 사도들과 교제한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서 역사하시도록 하기 위해서 아라비아 사막으로 갑니다. 이 말은 사실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자아를 죽이고 자신의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서입니다. 그곳에서 3년 동안 묵상하고 말씀 읽고 기도하고 하나님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이죠. 이 3년의 기간이 지나고 예루살렘에 올라옵니다. 예루살렘에 와서 사도들과 교제를 나눕니다. 15일 동안. 거기까지가 우리가 지난주에 살펴본 내용이었습니다.
이제 그다음 이야기를 봅니다. 1절을 보십시오. "14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2장이 14년 후라고 했는데, 이 14년이 되는 기점은 1차 예루살렘 방문으로부터 14년이 경과한 후입니다. 과거에 가서 15일 동안 사도들과 교제하고, 그리고 나서 다시 14년 후에 예루살렘에 올라갑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동행자가 있습니다. 누구와 함께 갔습니까? 바나바와 디도와 함께 갔습니다. 바나바와 디도와 함께 갔다는 것이 두 가지 의미에서 의미심장합니다. 첫째는 지금 현재 바울이 어떤 상황에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지금 사도행전과 같이 막 섞어서 하니까 사도행전 말씀을 잘 모르면 좀 헷갈릴 수가 있고, 이게 무슨 말씀인가 할 수 있는데 사도행전을 읽어 보셔야 됩니다.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동행하는데 어느 교회에서 왔느냐 하면 안디옥 교회에서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핍박이 왔고 그 핍박 때문에 흩어진 사람들이 북쪽으로 북쪽으로 올라가다가 수리아 지역에서 안디옥 교회를 개척합니다. 그런데 그 교회의 첫 번째 목사님으로 예루살렘 교회에서 파송한 사람이 바나바입니다. 바나바는 혼자 목회하지 않고 고향 다소에 가 있던 바울을 데려다가 함께 목회합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갔다는 것은 현재 바울의 상황이 안디옥 교회를 목회하고 있었던 중이라는 뜻입니다. 이것 이해되시죠.
그리고 또 두 번째 의미가 있습니다. 바나바는 유대인입니다. 즉 할례로 따지면 바나바는 할례 받은 사람이고, 디도는 헬라인입니다. 이방인입니다. 그러니 할례로 따지면 디도는 할례 받지 않은 사람입니다. 여기에 바울의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한 사람은 할례 받은 사람을 데리고 갔고 한 사람은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 헬라인을 데리고 갔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루살렘에 가면 일반적으로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 말고 방문자들이,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오면 반드시 가는 곳이 있지 않겠습니까? 어딜 갑니까? 성전을 가겠죠. 유대인들은 당시 헤롯 성전인 그 성전을 반드시 방문하려고 합니다. 가고 싶기도 하고, 과거 옛날 솔로몬 성전 시절부터 사람들은 이 성전 DNA가 유대인들 속에 아주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성전에 올라가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성전 올라가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할례 받은 유대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은 성전에 못 들어갑니다. 지금 이 문제가 여기에 첨예하게 걸려 있는 상황입니다. 갈라디아서는 가벼운 책이 아닙니다. 이런 여러 가지 정치적인 역학 관계를 보고 이 1절을 보시고 그다음 2절을 봅니다.
2절, "계시를 따라 올라가." 계시를 따라 올라갔습니다. 계시는 누구로부터 오는 것입니까? 하늘로부터,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계시가 오는 것인데 바울은 지금 어떤 계시를 구체적으로 받았는지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이 14년 이후에 안디옥 교회를 목회하다가 할 일 없이 올라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계시를 받아서 올라간 것입니다. 목적이 있어서 올라간 것입니다. 그러면 그 계시 가운데는 디도를 데리고 가는 것도 이 계시에 포함된 것입니다.
자 올라갔습니다.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하는 복음을." 바울이 이방 가운데서 전하는 복음이 무엇입니까? 딱 한마디로 말하면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이신칭의, 오직 믿음, 구원은 믿음으로부터 말미암는 것이다, 그것 위에 모든 것은 다 헛되고 헛된 것이다. 이것이 바울이 지금 이방에서 전하는 복음 아닙니까?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그들이 누굽니까?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바울이 말합니다. "유력한 자들에게." 유력한 자들이 누굴까요?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유력한 자들은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을 말합니다. 즉 베드로, 야고보 같은 지도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사사로이 했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사적인 교제를 가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즉 바울이 지금 이방인들에게 전했던 자신의 복음을 공적인 자리에서 회당에 사람들 모아 놓고, 혹은 공적인 자리에서 사람들 운동장에 모아 놓고 설교했다는 뜻이 아니고,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을 모아 두고 그들에게 사적으로 이 복음을 전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왜 그래야 됐을까요? 보십시오.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달음질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지속적으로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것을 전하는 이 사역입니다. "이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바울이 이렇게 한 이유가 예루살렘 교회에서 방해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흔히 우리가 하는 말로 세상 사람들이 하는 말로 여자의 적은 여자라 하잖아요. 그런데 교회가 교회 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오히려 교회일 때가 많습니다. 교회의 적은 교회일 때가 많습니다. 복음을 전하는데 바울이 지금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것을 전하는데, 안디옥 교회를 지금 목회하고 있잖아요.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개척한 교회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모교회입니다. 뿌리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 교회에서 이 복음을 방해하는 유대인들의 세력들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14년 동안 견디다가 바울이 바나바와 헬라인 디도를 대동하고 갑니다. 그래서 지도자들을 만납니다. 유력한 자들, 그들에게 믿음으로만 구원받는 것이 틀렸느냐고, 논리로, 이것은 그냥 싸움이 아니고 바울은 복음을 원색적으로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나 야고보, 요한에게 이것은 자기가 한 일이 아니라 계시로 인한 것이다. 지금 이것을 2장 주두에 명확하게 선제적으로 선포하고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다음 일들입니다. 3절을 보세요.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자, 헬라인 디도가 그들 앞에 딱 있습니다. 바나바와 디도가 딱 대동해서 좌청룡 우백호로 있습니다. 한번 그림을 상상해 보십시다.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 세 분의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주의 형제 야고보,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 세 명의 기둥입니다. 베드로와 요한, 이 세 분이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이, 유력한 자들입니다. 이분들을 바울과 바나바와 디도가 만났습니다. 그러면 이 세 분이,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이 생각할 때 누가 걸립니까? 지금 디도가 걸리는 것입니다. 디도가 뼛속 깊이 유대인들인 이 세 분은 교회 지도자들이라고 그리고 이 교회에 세 분이 왔다 갔다 하잖아요. 바울도 바나바도 디도도. 그러니까 주변 사람들이 자꾸 이 지도자들에게 "저놈은 할례도 안 받은 헬라인 아닌가, 저놈이 할례도 안 받고 여기를 얼쩡거리나" 하고 자꾸 그 이야기를 입에 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