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질서, 채움

본문: 창세기 1:3-25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서 성장합니다. 성장하다가 황금 같은 장년기를 보냅니다. 그런데 그 시간은 길지 않고 굉장히 짧습니다. 그 황금의 기간을 보내고 나면 나이 들고 늙고 병들고 그리고 죽어 세상을 떠납니다. 이것은 누구나 겪는 인생의 생로병사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발달 과정을 완전한 발달 과정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발달 단계를 보다 더 세분해서 나눕니다. 1943년 미국의 심리학자 매슬로우는 인간의 발달 단계를 심리적 욕구의 단계로 다섯 단계로 나누었습니다. 그 첫 번째 단계가 생리적 욕구이고, 두 번째는 안전의 욕구입니다. 세 번째는 애정과 소속감의 욕구이고, 네 번째가 존경의 욕구이며, 다섯 번째가 자아실현의 욕구입니다.

그런데 매슬로우는 이러한 인간의 발달 단계 과정은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넘어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생리적 욕구의 단계에만 머물러 있으면, 그 사람은 몸은 성장할지언정 정상적인 인간의 발달 과정을 겪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애정과 소속감의 욕구 단계에만 머물러 있고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사회화가 덜 된 사람이라고 부를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발달 과정은 서양의 학자들만 말한 것이 아니고, 동양에서도 역시 비슷한 사고가 존재했습니다.

공자는 논어 위정 편에서 역시 사람의 발달 과정을 이렇게 나누고 있습니다. 열다섯이 되면 지학(志學)해야 하고, 서른이 되면 이립(而立)해야 하며, 마흔이 되면 불혹(不惑)해야 하고, 쉰이 되면 지천명(知天命)하고, 예순이 되면 이순(耳順)하며, 일흔이 되면 종심소욕(從心所欲)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열다섯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학문에 뜻을 품지 못하고, 서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도덕적으로 바로 서 있지 못하고, 마흔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세상일에 흔들려서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사람은 큰일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고, 이 세상에서 쓸모없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공자가 말했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여러 학자들이 이렇게 인간의 발달 단계를 나누는 것을 우리는 보면서 참 지당한 말씀이라고 고개를 끄덕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영적인 발달 단계도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 생활을 하고 있는데, 신앙생활하는 사람의 영적 발달 단계 중에 가장 획기적인 단계는 하나님을 만나기 이전과 하나님을 만나고 난 이후의 달라진 삶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사건을 다루고 있으나, 사실 우리 인간에게 적용시켜 볼 말씀이 훨씬 더 많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새 창조 이전에 우리의 인생은 흑암과 혼돈과 공허의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만나고 난 이후에는 흑암에서 빛으로, 혼돈에서 질서로, 공허에서는 채움으로 변화됩니다. 그런데 가끔 믿음 생활을 잘한다고 자부하는 사람들 중에도 아직까지 이런 변화를 확실하게 겪지 못한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나는 믿음 생활한다고 했는데, 수십 년 신앙생활하고 있는데 확실하게 변화되었는지, 확실하게 창조 이전의 단계에서 창조 이후의 단계로 넘어갔는지, 우리 자신을 말씀에 비추어서 돌아보는 은혜의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 흑암에서 빛으로

하나님의 창조는 첫째로 흑암에서 빛으로의 창조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 3절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창 1:3)

하나님께서 온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는 그 첫날에, 하나님의 첫 번째 말씀이 "빛이 있으라"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빛이 있으라" 말씀하심으로 흑암이 물러났습니다. 흑암은 어둠과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 빛이 조금 있고 어둠이 훨씬 더 많은 어둠이 아니라, 흑암은 빛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빛이 없는 삶은 어떻게 됩니까? 빛이 없으면 어떤 일도 할 수 없습니다. 흑암 가운데 있어서는 어떤 일도 시작해 볼 수가 없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암흑천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태초 첫날에 빛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이제부터 내가 일하겠다, 빛을 창조하심으로 이제는 내가 특별한 일을 하겠다는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똑같은 이야기를 요한복음 1장 4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4)

여기는 생명이라는 말과 빛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생명은 누구입니까? 빛은 또한 누구입니까? 요한이 말하는 생명, 요한이 말하는 빛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빛이 되시고 예수님께서 생명이 되셨습니다. 이 말씀을 오늘 우리에게 적용시켜 보면, 창조 이전에 우리의 상태는 예수님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흑암이었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저마다 열심히 일을 합니다.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노력합니다. 그러나 생산적인 일을 하지 못합니다. 생명력이 있는 일을 하지 못하고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 생명을 만나기 이전, 빛 되신 주님을 만나기 이전 우리의 삶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우린 열심히 수고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수고했고 돈도 열심히 벌었습니다. 땀도 열심히 흘렸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맺은 열매를 한번 보십시오. 그 열매 가운데 과연 생명을 살리는 열매가 있었는지, 그 열매 가운데 정말 창조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열매가 있었는지, 그 열매는 모두 다 나를 기쁘게 하는 열매 아니었습니까? 그 열매는 모두 다 나의 영광을 위한 열매 아니었습니까? 사실 그 열매는 사람을 살리는 열매라기보다도 사망의 권세에, 공중의 권세 잡은 사탄이 기뻐하는 열매 아니었습니까?

그러나 주님을 만나고 난 이후, 생명 되신 주님, 빛 되신 주님을 만나고 난 이후에, 창조 이후에 우리가 맺은 열매는 다릅니다. 생명이 있는 열매를 맺습니다. 예수께서 생명이 되시고 예수께서 빛이 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1-1. 아우구스티누스의 회심

우리는 이런 인생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중세 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아우구스티누스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굉장히 유명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는 어려서부터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부모님은 그에게 큰 기대를 가졌습니다. 법률을 공부해서 위대한 법률학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생각하고, 그를 카르타고로 유학을 보냅니다. 하지만 그는 법률에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고전을 공부했지만 그러나 마음을 뜨겁게 만들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는 카르타고에서 마니교에 심취해 버렸습니다. 이교도의 사술에 빠져 버린 것입니다.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어떤 여인을 만났습니다. 사랑에 빠졌습니다. 동거합니다. 아이까지 낳았습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그의 어머니 모니카는 깊은 슬픔과 시름에 빠집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런데 아들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는 신플라톤주의 철학에 더 빠져들고 심취했습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그는 어둠 가운데, 흑암 가운데 빠져드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 안에는 진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밀라노에서 대주교로 활동하던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를 듣습니다. 그의 설교를 들으면서 그의 마음속에 지금까지 고민했던 것들이 다 풀리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인 성경을 읽기로 결심합니다. 성경을 읽다가 어느 한 구절에 와서 그의 인생이 획기적으로 바뀌어집니다. 로마서 13장 12절에서 14절까지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