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중심에 서 있는 사람들, 어떤 조직의 핵심에 있는 사람들은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잘 알지 못합니다. 잘 알지 못할 뿐더러, 중심에 있는 사람들은 변방에서 일어나는 일에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하찮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별볼일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역사를 통해 살펴보면, 위대한 변혁과 역사적 대사건은 중심이 아니라 변방, 저 끄트머리에서부터 시작되어 중심으로 옮겨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것 같았던 로마 제국의 몰락도 사실은 중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저 변방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감당하지 못해 일어났습니다. 로마는 기원전 27년부터 기원후 180년까지 약 2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팍스 로마나(Pax Romana), 곧 '로마의 평화'라는 시대를 구가했습니다. 위대했던 오현제 시대를 통해 그들은 영원한 제국의 영화를 꿈꾸었습니다. 영원히 지지 않을 것 같은 이 나라의 영광을 갈구하며 그렇게 살아갈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팍스 로마나가 끝나고 300년이 채 되지 못해 로마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395년에 로마는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열되었고, 476년에 서로마 제국은 역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어떻게 이토록 위대한 제국이 순식간에 무너지게 되었습니까? 그 당시 중국에는 한나라가 중심을 잡고 번성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민족들이 한나라 영내에서 살 수 없었습니다. 우리 민족에게 잘 알려진 흉노족, 그들이 한나라 경내에 살 수 없으니 자꾸만 서쪽으로 살아남기 위해 말을 타고 서진했습니다. 우리에게는 흉노족으로 알려져 있는데, 유럽 사람들에게는 훈족으로 잘 알려진 민족입니다. 훈족이 그 당시 평화롭게 살고 있던 게르만족의 한 일파인 고트족을 압박합니다.
고트족은 자기들끼리 평화롭게 살고 있었는데, 동쪽에서 밀려온 훈족 때문에 압력을 받아 로마 영내로 진입합니다. 이른바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시작된 것입니다. 고트족뿐만 아니라 곳곳에 흩어져 있던 게르만족이 모두 로마로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로마는 그렇지 않아도 복잡했던 국내 정세 때문에 감당할 길이 없었고, 고트족의 침입과 게르만족의 이동을 감당해 낼 재간이 없었습니다. 476년에 고트족의 용병대장이자 게르만족의 지도자였던 오도아케르가 로물루스 대제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왕이 되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로써 서로마 제국은 멸망했습니다. 복기해 보면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 작은 기마민족이었던 훈족이 고트족을 압박하고, 그들이 로마로 들어와서 로마가 우왕좌왕하다가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대제국이 이렇게 멸망할 수 있는가 하는 역사적 교훈을 우리는 이 흐름을 통해 배우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의 흐름, 세계의 흐름은 이렇게 변방에서 시작된 아주 작은 변화들이 대제국까지 몰락시킨 경험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이것은 역사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도 이렇게 변혁되고 바뀌어 갑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이루어 가실 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저 갈대아 우르, 저 변방 끝에서 한 사람을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하란으로 부르셨고, 하란에서부터 팔레스타인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이미 노년이었습니다.
불면 꺼질 것 같은 한 노인을 통해서 하나님은 변방에서부터 믿음을 시작하셨고, 그 믿음은 오늘 우리에게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도 한번 보십시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 독생자 예수님을 그 당시 제국의 중심 로마에서 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로마의 식민지 팔레스타인, 그것도 시골이었던 갈릴리에서 자라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때가 되매 로마로 하여금 기독교를 공인하게 하시고, 예수의 복음은 로마의 판테온 신전을 딛고 일어나 세계 종교로 발돋움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역사입니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혹시 우리가 변방에 있다고 두려워하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올해를 시작하면서 지금 내 위치가 불안정하다고 불안해하시는 분도 아마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변방, 저 끄트머리에 있든지, 나의 위치가 불안정하든지,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성령과 함께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이것이 훨씬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과 함께 거하는 자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능력, 그 위대함을 우리에게 증거할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내가 누구와 함께 거해야 하는지, 그러면 승리하며 살 수 있음을 함께 확인하시고 은혜 받는 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12절 말씀입니다.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시점이 중요합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몰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이 시점이 언제입니까? 하나님의 칭찬을 듬뿍 받은 직후입니다. 예수님께서 겸손하게 세례 요한에게 가셔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세례는 죄인이 받는 것인데 예수님은 한 점 죄가 없으십니다. 그런데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이유는 겸손하셨기 때문입니다. 겸손하게 세례 받으셨을 때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셨습니다. 하늘 문이 열렸습니다.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칭찬하셨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나님이 이렇게 칭찬하셨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유일하게 동시에 등장하시는 장면까지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무척 기뻐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예수님을 칭찬하셨다면 예수님을 광야로 이끌어 가실 것이 아니라 궁전으로, 보다 더 안락하고 편안한 곳으로 모셔 가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성령을 통해 예수를 이끌고 간 곳은 광야였습니다. 그 광야에 무엇이 있었습니까? 13절 말씀입니다.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광야에서 예수께서 사십 일을 계셨습니다. 사십 일 동안 무엇을 하셨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예수님은 사십 일 동안 금식하셨습니다. 광야에는 배고픔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배고픈 상태로 기도에 집중하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기도만 하는 것도 힘든데 사십 일을 금식하면서 기도하는 것은 극한의 체험입니다. 그런데 사탄이 와서 시험합니다. 돌을 보여주며 떡덩이가 되게 하라, 나에게 절하라, 높은 데서 뛰어내려라. 사탄은 끊임없이 예수를 시험합니다.
가만히 있어도 힘겨운데 사탄의 시험이 닥쳐오면 영적인 싸움을 하는 것이 얼마나 힘에 겨운지 모릅니다. 하나 더 있습니다. 들짐승의 위협입니다. 곳곳에서 들짐승이 울어댑니다. 들짐승이 울부짖으며 예수를 집어삼키려 합니다. 눈을 희번덕거리며 울부짖는 짐승들이 예수님 주변의 광야에서 예수를 집어삼키려고 주위에 몰려들었습니다. 삼중고의 고통입니다. 성령께서 어떻게 예수에게 이렇게 하실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칭찬을 받은 예수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고 선언된 예수님을 어떻게 하나님이 이렇게 내버려 두실 수 있다는 말입니까? 우리로서는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런 일이 오늘 우리 인생에도 다반사로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칭찬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함께 해 드렸습니다.
말씀을 붙들고 부여잡고 살려고 발버둥 치고 애쓰고, 힘겨운 일이 있으면 기도하고, 나아가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돕고 섬기고, 주어진 일에는 누구보다도 더 성실하게 감당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기뻐한다."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이 나를 인도하고 이끌어 가는 곳은 바로 광야였습니다. 광야에 가 보니 배고픔이 있습니다. 물질의 고통이 있습니다. 풍성하지 않습니다. 항상 자원이 부족하고 물질 때문에 고통받고 힘들어합니다. 그것도 힘겨운데 사탄은 여러 가지 말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이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질지도 모르는 위협이 우리 인생 눈앞에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끝입니까? 밤낮으로 나를 집어삼키려는 들짐승 같은 사람들이 우리 주변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넘어지면 그들에게 집어삼켜져 형체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뜯어먹힐 지경의 삶이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악한 짐승들이 둘러싸고 있습니다. 우는 사자처럼 우리를 삼키려고 하는 삼중고의 고통으로 우리는 지금 힘겨운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습니까? 하나님 어떻게 저에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제가 하나님께 잘못한 것이 무엇입니까? 저는 하라는 대로 했고 성실하게 이 일을 감당했는데 왜 제가 이런 고통을 겪어야 됩니까?
그런데 오늘 이 13절 말씀을 보면 한 가지 희망을 발견합니다. 13절 말씀입니다.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하나님께서는 우리 예수님을 지키기 위해서, 돌보기 위해서 자신의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성령과 함께하는 예수님을 돌보기 위해서 천사를 보내어 배고픔도 견디게 하시고, 고통도 견디게 하시고, 사탄의 위협과 시험에도 철통같이 지키고 방어하게 하셨고, 들짐승이 예수를 삼키려고 할 때도 그들의 입을 막으시고 돌보시고 지켜주셨습니다. 예수님을 힘드실 때마다 수종들게 하시고 지키신 그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천사를 보내 예수를 지키신 하나님의 능력이 오늘 우리 인생도 함께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힘겹고 어려워하는 우리 인생들, 광야 길에서 서너 가지 위협에 둘러싸여 있는 우리들에게도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서 돌보시고 수종들게 하시고 책임지시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셨다는 사실은 "내가 너를 지키고 있다, 내가 너를 주목하고 있다, 두려워하지 마라, 염려하지 마라"는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의 표시입니다. 하나님은 광야 끝에서 시험에 빠져 있고 어려워하고 있는 자를 눈여겨보십니다. 옛날 하나님의 관심은 광야 끝에 있는 예수에게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눈길과 관심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성경은 하나님의 관심과 하나님의 관점을 따라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 시절에 역사가들의 관심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들의 관심은 로마의 황제에게 있었습니다. 로마 황제가 어떤 음식을 먹는지, 누구를 만나는지, 오늘 어떤 말을 했는지, 그들의 정책은 어떠했는지, 주변 국가와의 관계는 어떤지, 모든 역사가들의 관심은 권력의 핵심, 정점, 그 중심, 세계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로마 황제 따위에는 일절 관심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령과 동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예수를 이끌어 광야로 가셨으니 하나님의 관심은 광야 끝자락에 있는 예수에게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광야에 산다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도 우리 인생을 눈여겨 지켜보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내가 광야에서 고통받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바로 나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 그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