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현 작가 ∙ 번역가
#씹O끼 #종로 #마음의고향 #수호신 #동네
<aside>
혹시 “차가운 씹O끼들의 도시 서울”이라는 말, 들어 보셨나요? 저는 현재 대구에 거주하시는 작가분에게 처음 들었는데요. 듣자마자 웃을 수밖에 없더라고요. 제가 서울에서 나고 자랐고 이 도시를 사랑하긴 하지만, 이 짧은 말에 응축된 문제점들은 부정할 수가 없어요.
이 말을 처음 유행시킨 hm님의 짧은 글을 찾아보면 이렇습니다.
“안녕 서울... 내게 방한칸만 내주었고 단한번도 집인적은 없었던 차가운 씹O끼들의 도시여... 그래도 그 다채로움과 익명성만큼은 정말로 그리울것이야...”
심금을 울리는 훌륭한 한 편의 시 아닌가요. 엄청난 인구밀도, 좋지 않은 공기, 여름 더위를 더 끔찍하게 만드는 아스팔트, 다른 지방에는 사람도 안 사는 것처럼 구는 서울중심주의, 무엇보다도 끊임없이 이사를 다니게 만드는 부동산 문제에 이르면 ‘씹O끼들의 도시’라는 말을 들어도 할 말 없죠.
그래도 저에게 서울은 집이기도 한 까닭에, 다른 지역 분들에게 “서울은 올 때마다 싫어진다” 같은 말을 들으면 열심히 변명을 하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이 거대한 도시는 사실 작은 도시 여러 개나 다름없고, 잠깐 들러 본 사람은 모르는 좋은 곳들이 있다고요. 여기에도 누군가의 정든 ‘동네’가 있다고요.
재미있는 건, 제가 서울에서 사랑하는 동네를 말하려고 할 때 먼저 떠올리는 곳은 태어나서 20년을 성장한 곳이 아니라는 거예요. 얼마 전에도 그 동네에 다시 가보았는데 너무 많이 변한 데다 특색도 사라져서 영 마음이 붙지 않더군요. 지금은 오히려 사대문 안, 종로 일대에서 그리움을 더 많이 느껴요. 어렸을 때 제가 사는 동네에는 영화관도, 큰 서점도, 쇼핑몰도 없었기에 친구들과 놀러 나가면 꼭 종로였거든요.
종로가 제 마음의 고향이 된 건 꼭 어린 시절을 보내서 만은 아니고, 그 시간들을 돌이킬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죠. 서울의 사대문 안만큼은, 아무리 많이 변한다 해도 지표처럼 남아있는 장소들이 있으니까요. 몇 년 전에 종로 1가의 피맛골을 밀어버리고 반짝반짝한 새 건물이 들어선 모습을 보고 휑해진 마음으로 그걸 실감했어요.
변화가 무조건 나쁘다고 말하는 건 아니에요. 세상에 변하지 않는 건 없죠. 하지만 과거를 싹 치우고 새것을 만드는 건 어떤 공간의 기억을 지우는 일이고, 단절이고, 개인에게나 집단에게나 뿌리를 잃는 경험으로 이어질 수 있거든요. 분명히 연속성 있는 변화도 가능할 텐데 우리는 왜 이렇게 사는 걸까요.
제가 『서울에 수호신이 있었을 때』를 쓸 때, 그 안에는 이런 생각들이 켜켜이 쌓여 있었습니다. 남대문이 불탔을 때나 피맛골 골목 하나가 흔적 없이 사라졌을 때 떠올린 생각들이 씨실이 되고, 서울이 점점 커진 역사를 들여다보다가 든 생각이 날실이 됐죠. 조선시대에는 집마다 성주신이 있고 다양한 가택신들이 있다고 믿었는데, 오래된 집을 무너뜨릴 때 그 신들은 어디로 갈까. 100년 동안 존재했던 경기도 어느 마을이 서울에 편입되었을 때, 그 마을을 지키던 당산나무는 어떻게 되는 걸까. 한양이라는 도시에 수호신이 있었다면, 한양이 경성이 되고 서울이 되었을 때 그 수호신은 어떻게 변했을까 같은 생각들이요. 제가 생각하는 이 수호신들은, 사람이 공간에 담는 마음 같은 거예요.
부디 제가 사랑하는 서울이 마음 없는 (차가운 씹O끼들의!) 도시가 아니라 누군가의 정든 동네로 계속되기를 바랍니다. 결국 사람이 도시를 만드는 것이지, 도시가 사람을 만드는 게 아니니까요.
</aside>
<aside> ✏️
이수현(작가 ∙ 번역가)
사실주의 문학도 읽기는 하지만, 처음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부터 쭉 상상 문학에 둘러싸여 살아서 사실주의로만 이루어진 세상을 상상하지 못하는 책벌레. 번역과 창작을 20년 가까이 해왔으나 스스로를 생각할 때 제일 먼저 ‘독자’로 여기는 편이다. 석사과정까지 전공한 인류학이 지금도 가장 사랑하는 학문이자 사고방식의 바탕에 있다. 인류학과 번역과 창작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느낀다. 신화, 민속, 생태, 미시사에도 꾸준히 관심이 있으며 가끔 교양과학서에서는 SF 이상의 경이감을 느낀다.
저서 『원하고 바라옵건대』 안전가옥, 2024 (공저) 『서울에 수호신이 있었을 때』 새파란상상, 2022 『외계 신장』 알마, 2020 외 다수
역서 『포스윙』 레베카 야로스, 북폴리오, 2024 『블러드 차일드』 옥타비아 버틀러, 비채, 2016 『빼앗긴 자들』 어슐러 르 귄, 황금가지, 2002 외 다수
</asi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