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런 엘리스의 단편 중에 '유한한 세계에 사는 무한한 사람'이 나오는 이야기가 있다. 취미로 가꾸는 텃밭처럼 인류의 중대하고 사소한 사건들에 선으로건 악으로건 조금씩 손을 대온 사람. 그렇게 오래 살면 인간에 대한 희망도 절망도 없이 초연해질 수 있겠지 싶었다. 그 소설을 떠올리면 단순히 호기심만으로 불멸이라는 걸 해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누가 시켜준다면.

'태평성세'라는 말이 존재하지만 솔직히 인류의 역사에 그런 게 존재했을리 있겠는가? 극히 미시적인 차원에서도 그런 건 있을 수 없다. 앞으로도 없을 거다. 간혹 호기심으로 불멸을 꿈꾸는 순간에도 단 한 가지 사실은 의심하지 않을 수 있다, 장밋빛 미래 같은 건 영원히 불가능하다는 것. 태평성세나 장밋빛 미래 그 근사치의 근사치의 근사치에 다가가는 게 우리의 최선이다. 그걸 모른다면 불멸은 저주일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아주 더디게 나아가고 매우 쉽게 퇴보하니까.

다른 사람에게서 전해듣지 않고 내가 직접 목도한, 한국 정치사에서 가장 영화적인 순간으로 남은 기억이 있다.

2010년에 있었던 서울시장 후보자 토론회에서의 한 장면이다. 재임을 시도한 당시 서울 시장이자 후보가 그다지 당선 확률이 높지 않은 다른 후보에게 토론 내내 수세에 몰리며 털리고 있었다. 토론 막바지에 그 후보가 진중하고 조심스러운 태도로 시장에게 물었다. "누구누구 씨를 아십니까?" 시장은 모르는 눈치였다. 듣고 있는 사람들 모두에게 낯선 이름이었다. 후보는 연달아 몇 사람의 이름 석자를 부르며, 시장에게 아느냐고 물었다. 시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김남훈 경사, 이제 아시겠지요." 시장의 얼굴에 표정 관리를 위한 노력이 뚜렷해지던 순간 우리도 그 이름들의 정체를 알았다. 한 해 전 용산 참사에서 사망한 이들의 이름이었다. 후보는 시장에게 이 참사와 참사의 희생자를 테러리스트로 내몬 것에 대해 서울 시민에게 사과할 용의는 없느냐고 물었다. 시장은 "용산 사건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남긴 사건이었습니다" 하고 답했다. 그 이후의 내용은 생각나지 않는다. 시장은 작은 표 차이로 연임에 성공했고, 당선 기능성이 적었던 그 후보는 제1야당 후보와 단일화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무지막지한 욕을 먹었다.

당시 그 시장은 몇 년 후 무상급식을 반대하느라 스스로 시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몇 년 후 노회찬 전의원이 세상을 떠났다. 다음으로 시장이 된 사람은 성범죄를 저지르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빈 자리를 두고 또 다른 시장 선거가 진행 중이다. 오세훈 후보가 돌아왔고 '박원순 사건의 진상'을 파헤친다는 신간이 베스트셀러 코너에 진열되어있다. 오세훈 후보는 용산 참사가 임차인 탓이라는 발언을 했다가 사과를 거듭하고 있다. "책임을 느끼고 있으며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노회찬 후보는 2010년의 토론회에서 오세훈 후보에게 용산 참사의 책임이나 재발방지에 대책에 대해 묻지 않았다. 사과할 용의를 물었다. 2010년의 오세훈 후보는 사과하지 않았다.

무능한 사람에게 회생의 기회가 주어지고 그가 승리할 가능성을 높여주는 가장 큰 요인이 무엇일까? 그 다음으로 힘 센 사람의 무능 때문이다. 무능에 기생하는 것, 그 무능에의 기생에 기생하는 것 사이에서 볼모가 된 기분으로 투표소로 간다. 이제는 이 곳에 없는 사람들, 그들이 가져가버린 실낱같은 가능성과 비겁함에 대해서 생각한다. 남아있는 이들 중 염치가 조금이나마 있는 사람들, 꾸준히 몰염치하고 무능한 사람들, 그리고 불가능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세상이 나빠졌다 좋아졌다 나빠지기를 반복하는 사이 나는 그들 덕에 꾸준히 단단해진 것 같다. 한 순간에 고꾸라지지 않고 길고 가늘게 절망하는 법을 익혔다면 이것도 일종의 낙관주의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불로장생을 꿈꾸지만 필멸자이므로, 전지적 시점에서 관전만하고 싶지만 영원히 이곳의 구성원일 수 밖에 없으므로 하다 못해 이런 글이라도 쓴다. 까먹지 않기 위해서.

(2020. 4.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