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해률 극작가
#세입자 #집업실 #집돌이 #꼭꼬핀 #프리랜서의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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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집으로 이사를 온 지도 벌써 4년이 되어갑니다. 전셋집의 두 번째 재계약을 앞두고, 새삼 이 집에 처음 발을 들이던 때를 떠올려보았습니다. 그 동안 많은 것들이 달라졌네요. 꽂혀 있는 책보다 쌓여 있는 책들이 더 많아졌고, 매트리스는 슈퍼싱글에서 더블이 되었고, 널널했던 주방의 찬장은 이제 각종 집기들로 가득합니다. 문득, 안 쓰는 물건들은 정리를 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쌓아두기를 좋아하는 세입자 때문에 상당한 무게를 감당하고 있는 우리 집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하구요. 물건만 쌓이는 게 아니라 미안한 일 역시도 쌓여만 갑니다. 오늘 아침에는 꼭꼬핀을 벽에 꽂았는데, 위치가 마음에 들지 않아 벽지를 여러 번 쑤셔대야만 했거든요. 세입자 주제에 귀하신 전셋집에 낸 상처가 참으로 많습니다.
이 미안한 세입자는 게다가 마땅한 직장도 없는 지라 집에 있는 시간이 참으로 깁니다. 어쩌면 집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를 텐데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갈 곳은 마땅치 않고, 어차피 나가면 다 돈인데. 1.5룸 내외의 집들만을 거쳐 오면서 터득한 노하우가 있다면, 하나의 공간을 여러 용도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거실로 지어진 방은 거실이기 이전에 드레스룸이면서, 다이닝룸이면서, 작업실이면서, 보드카페면서, 점집이기도 합니다. 옷을 갈아입는 곳에서 밥도 먹고, 글도 쓰고, 게임도 하고, 셀프로 타로도 봅니다. 집이 충분히 다른 장소들을 대신해주니 오늘도 나가지 않으렵니다.
다만 집이 그리 다양한 장소로 변모하기 위해선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특히 작업실로의 변신은 집 혼자만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에요. 원고 노동을 하는 장소로서의 뉘앙스를 만들어주기 위해선 우선 점심에 먹은 짜파게티 냄새를 없애야 합니다. 향초나 인센스가 있으면 수월하겠지만 허리띠를 졸라맨 요즘은 환기로 대체합니다. 조명은 최대한 밝게 합니다. 어두운 조명에서 오는 안락함이 집중을 도와주기도 하지만 잠을 오게도 하기 때문이죠. 마지막으로 ‘가사 없는 잔잔한 음악 플리’를 유튜브에서 검색해 틀어주면, 짜잔, 그제야 변신 완료입니다. (공부 시작 전에 하는 책상 정리 같은 이 구차한 의식을) 우리 집은 기꺼이 기다려줍니다. 이 세입자를 위해 기꺼이 작업실이 되어줍니다.
지금 집은 지난 집들보다 품이 넉넉한 편입니다. 덕분에 지을 수 있었던 이야기의 수가 비교적 많았거든요. 앞으로 몇 년을 더 이 곳이 내 집이, 내 작업실이 되어줄지 모르겠지만 그 품의 덕을 톡톡히 보고 떠나야겠습니다. 아침에 낸 꼭꼬핀 자국이 갑자기 더 미안해집니다. 혹시나 벽지의 상처가 아물 수 있을까 싶어 손가락으로 살살 문대봅니다. 미안한 세입자의 마음이 잘 전달될 수 있게, 살살. 그러다 처음 보는 얼룩을 발견합니다. 함께 산 지 4년이 되어 가는데도 새로운 것이 보이다니요. 누군가의 속에 들어와 잠을 자고 밥을 먹고 글을 써도 여전히 그 누군가를 다 알 수는 없습니다. (새 창을 열어 내가 모르는 얼룩에 대한 희곡을 쓸까 싶다가, 조금 뻔한 소재라는 생각에 금방 접었습니다.)
전세계약을 연장할 수 없는 때가 아무래도 올 것입니다. 어쩌면 다음 세입자는 거실을 거실 답게 쓰는 세입자가 올지도 모르겠네요. 꼭꼬핀 하나 꽂는 것도 신중한 세입자가 올지도 모르겠구요. 알지도 못하는 미래의 세입자들과 우리 집의 사이가 벌써부터 질투가 납니다. 잠깐이라도 집과 거리를 좀 둬야겠어요. 집에만 있으려고 했는데 오늘은 산책이라도 다녀와야겠습니다. 밖을 좀 걸으면서 계약 만료 전까지 집과 나의 관계가 얼마나 출렁일지를 가늠해 보려 합니다. 부디 지난 집들처럼 곰팡이나 빗물을 집으로 들이지는 않기를, 보증금은 제때 뱉어내기를. 무엇보다 이 세입자에게 얼른 또 새 희곡을 점지해주기를. 산책을 마치면 집과의 관계를 생각하며 타로 카드 한 장을 뽑아봐야겠어요. 부디 펜타클 열 개의 대운을 품은 카드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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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해률(극작가) 극작가. 희곡을 써 연극을 한다. 지금 이곳의 극장에서 유효한 이야기가 무엇일지 고민하고, 되도록이면 그런 이야기들을 희곡으로 옮기는 편.
작 <목련풍선><시차><차차차원이 다다른 차원><사월의 사원><서울 도심의 개천에서도 작은발톱수달이 이따금 목격되곤 합니다><여기, 한때, 가가><비엔나 소시지 야채볶음><7번국도>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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