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는 박경석 대표와 이준석씨의 썰전 토론을 보고 쓴 글이다.

<빌리 진 킹: 성의 대결>을 봤을 때 같은 이야기를 베넷 밀러 같은 사람이 연출한 영화로 또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의 결말에 환호와 통쾌가 예정되어 있었지만 개운하지 않았다. 빌리 진 킹은 비범한 인물이지만 그가 처한 현실과 바비 릭스의 게임은 천박하고 추했다. 저런 세상의 저런 조건 하에서 영웅이 되는 게 뭐가 기쁘겠어? 빌리 진 킹이 바비 릭스를 무찌르고 정의를 실현한 세상과 이 모든 것의 발단인 바비 릭스의 모욕이 존재하기 이전의 세상, 둘 중에 하나만 존재해야한다면 전자가 나을 것 같았다. 그래서 추한 게임의 룰에 응하고 승리한 사람의 내면, 모두가 환호하는 가운데 그가 느꼈을 그늘과 식은땀, 구역질을 상상했다.

빌리 진 킹은 완승이라는 결과를 확신했을까? 경기 전에 패배를 상상한 적이 한 번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바비 릭스에게 실력으로 뒤지지 않지만 혹시나 컨디션 난조든 뭐로든 단 한번의 게임에서 지게 된다면? 그런데 거기에 나말고 모든 동료 선수, 모든 여자들의 명예가 걸려있다면? 빌리 진 킹은 그 압박을 어떻게 소화하고 결심했을까? 승리라는 결과보다 그 과정에 더 큰 비범함이 있다. 그런데 그 비범함이 발휘된 상황적 조건은 너무나 허접하고 저급하다. 여자와 남자가 동등하다는 걸 증명할 수 있는 게임 같은 건 없다. 그런 건 게임이나 토론으로 증명되는 게 아니고 그게 누군가의 손에 달려있으면 안 된다. 빌리 진 킹도 그걸 알았고 그래서 응하지 않았지만, 먼저 그 게임에서 패배한 동료 선수가 있었다. 그 결과 바비 릭스와 그 뒤에 선 여성혐오자들은 더 의기양양해지고, 빌리 진 킹을 비롯한 여성 선수들은 더 커진 모욕과 불명예를 견뎌야하는 상황이 된다. 빌리 진 킹은 그 상황을 종결시키기 위해 게임에 응한다. 그 다음 실제로 종결시킨다. 그런데 내가 궁금한 건, ’빌리 진 킹이 만약 승리하지 못했다면?’이다. 그러면 그 세상은 어떻게 됐을지. 승리해서 모든 것이 제자리를 되찾았다면 그걸로 된 건지, 그 여부가 그 게임에 달려있어도 되는 것인지.

빌리 진 킹이 바비 릭스와의 경기에서 승리한 다음, 모두의 환호를 받은 다음 혼자 대기실에 들어와서 모든 걸 내려놓고 우는 장면이 있다. 빌리 진 킹이 실제로 그 순간 눈물을 흘렸다면 그 울음은 단순한 안도나 기쁨, 후련함이 아니라 훨씬 더 복잡한 뭔가였을 것이다. 거기에는 굴욕감도 있었을 것 같다. 우리가 왜 이런 게임에 응하고, 이 승리를 축하해야하는가? 그리고 그 질문은 빌리 진 킹이 패배한 평행우주에서도 변하지 않는다.

영화에서 그려진 바비 릭스는 은퇴 후 관심 자본이 필요해진 장사꾼이었다. 그는 95년도에 사망했는데 요즘이었다면 아마 유튜브를 했을 것이다. 빌리 진 킹과의 경기가 유튜브로 중계됐다면 승패 여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 경기에 달릴 실시간 댓글이 자동으로 연상된다. 빌리 진 킹이 승리해도 나이 때문에 무효라고 주장한다거나(이건 그 시대에도 있었을 것 같다). ‘바비 릭스가 진짜 승자인 이유’라는 제목의 가짜뉴스도 나왔을 것이다. 그리고 바비 릭스는 패배했어도 엄청난 구독자를 얻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혐오 팔이로 막대한 수익을 낸 은퇴한 테니스 선수일 뿐 예비 여당의 당대표가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아니다 그건 함부로 단언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단언할 수 있는 건 이거다. 이 게임이 멍청하고 저열하다는 것, 확고하고 당연한 무언가가 토론이나 테니스 경기로 바뀌지는 않는다는 진실은 어떤 가정의 세계에서도 불변하다. 너절해지는 것은 그것을 웃음거리로 만든 사람들의 존엄, 그걸 지켜보는 사람들의 비위, 이 괴상한 대결이 성사된 사회다. 빌리 진 킹이 바비 릭스와의 테니스 경기에서 패배했더라도 그걸로 달라지는 진실은 없다. 그 진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의 기분만 좀 좋아졌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