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연한 출발

김연재 극작가


#떠남 #집없음 #편도형이야기 #끝없는여행 #카프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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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단편 <돌연한 출발>은 말을 가져오라는 느닷없는 명령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어디로 갈 작정이냐는 하인의 물음에 주인은 이곳에서 끊임없이 떠나는 것만이 여행의 목표라고 답합니다. 식량도 없지 않느냐며 걱정하는 하인에게 주인은 덧붙입니다. “여행이 몹시 긴 터라 길 가는 도중에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면 나는 분명 굶어 죽고 말 것이다. 예비 식량도 나를 구할 수는 없다. 실로 다행스럽게도 이건 정말 엄청난 여행이라는 것이다.”

많은 이야기가 집을 떠나는 데서 시작합니다. 주인공은 고된 여정을 통해 세상을 경험한 뒤 보다 성장하고 고양되어 귀환합니다. 인류 최초의 서사시로 알려진 길가메시 이야기, 용감한 오디세우스의 이야기가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이야기도 있습니다. 여정을 마친 뒤 저승의 길잡이가 되기로 한 바리데기의 이야기가 그렇고 각종 변신 이야기들이 그렇습니다. 저의 경우에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 일명 편도형 이야기에 매혹되곤 했습니다. 문 밖을 서성이는 사람은 쉽사리 도착할 수 없는 법입니다. 어쩌면 집으로 어떻게 돌아가느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집을 어떻게 저버리느냐의 문제일지 모릅니다. 유랑에 깃든 까마득한 무(無)와 그것을 감당하는 삶의 모양, 의도적으로 안식을 잃어버리는 이상한 힘으로부터 우리는 진실을 발견할 수 있을 테니까요.

제 생각에 예술을 작동시키는 하나의 윤리가 있다면 그것은 집 없음의 윤리입니다. 예술은 우리로 하여금 이미 규정된 세계관을 의심하고 낯설게 바라보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낯선 곳으로 도피하거나 초월하려는 유혹을 뿌리치고 삶의 복잡한 면면을 감당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므로 집이 없는 상태로 쓴다는 것은, 기존의 인식으로부터 자유롭게 떠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떠남 자체가 집이 될까 염려하며 끊임없는 떠남 속에서 삶의 중력을 견디는 노동에 가까울 것입니다. 제 희곡 속 인물들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기를 선택합니다. 저는 이 불가해한 선택의 두께를 더듬으면서 글을 쓰고,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저 역시 집을 저버려야 한다는 사실을 자주 새롭게 깨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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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재(극작가)

극작가. 희곡에서의 여성적 글쓰기를 실천하며 문자, 말, 몸의 사이를 탐구한다. 극단 동 월요연기연구실에서 인류세 이후의 연극 형식을 실험하고 있다. <없는 시간>(2024), <매립지>(2023), <복도 굴뚝 유골함>(2022), <낙과줍기>(2022) 등을 쓰고 공연했다. 지은 책으로 『상형문자무늬 모자를 쓴 머리들』(이음), 『한쪽 발은 무덤을 딛고 나는 서 있네』(나선프레스, 근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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