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에서 내려서 반대 방향으로 되돌아가다가 나는 같은 동네에 사는 친구 네 명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어디 가니?” 물었고, 나는 “올드 빅”이라고 대답했다. “네가 바로 그쪽에서 걸어오고 있는걸”, 하며 그들은 나를 데리고 갔다.*1)
Mexico City
멕시코시티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한 적 없지만 누군가 내게 멕시코시티에 가면 잘 맞을 것 같다고 얘기한 이후부터 멕시코시티를 생각했다. 책에서 멕시코시티가 나오면 밑줄을 긋거나 누군가를 만날 때 멕시코시티에 가본 적이 있는지 물어보았고 그러다보니 그곳이 내 잃어버린 고향이거나 적어도 그 비슷한 무언가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으며 거기서 일을 하거나 적어도 생을 마감해야할지도 모르겠다는 책임 같은 것을 남몰래 느끼기도 했다. 내가 요모양인 건 멕시코시티에 가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몰라! 조급해지기도 했고 내가 간장종지인 것도 집중을 잘 못하는 것도 책 한권을 끝까지 다 읽지 못하는 병에 걸린 것도 평생 외톨이였던 것도 모든 원인은 거기에 있는 것만 같았고 틈틈이 멕시코시티를 검색하며 사진을 볼 때마다 친절한 멕시코 삼촌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생각할수록 나는 내가 보지 못한 영화들 속에 사는 것 같다. 걸작은 내가 보지 못한 영화들이다. 에리히 폰 슈트로하임의 《탐욕Greed》은 엄청난 영화다. 왜냐하면 아직 보지 못했기 때문에. 내가 그것을 보느냐 보지 않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나는 본 것을 잘 기억하지 못하며 기억에 남는다고 해서 그게 좋은 것일까, 좋다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은 기억을 과대평가 하는 일이다. 방금 읽은 소설에 대해 누군가 줄거리를 묻는다면 나는 대답할 수가 없다. 분명 읽었지만 말할 수 없다. 우선 내용을 잘 모르겠고…… 알아도 말로는 할 수 없다. 그럼 안 읽은 거 아냐? 물으면 아냐 근데 읽긴 읽었는데…… 난 뭘 한 거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안다. 전에 쓴 글들은 내가 글을 읽는 방식이 잘못되었음을 보여줄 뿐이고 어쩌면 멕시코시티에 가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멕시코시티는 멕시코 고원 중앙부 해발고도 2,240M에 있는 도시로 인구는 2020년 기준 이천백칠십팔만이천명이다.
DOUBLES VIES
“중요한 것은 이 세계가 계속 변하고 있다는 것이고 예술가로서 우리는 새로운 감정, 새로운 상황을 묘사하기 위해 새로운 장치, 새로운 도구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가치, 우리 자신의 구문법을 만들지 못한다면 우리 자신의 세계를 묘사하는데도 실패할 것이다”.2) 비평가 켄트 존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썼고 조너선 로젠봄은 그의 《이마 베프Irma Vep》 를 설명하는 글에서 위 내용을 인용했다. 나는 이마 베프를 보지 못했지만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최근작 《논픽션Non-Fiction》은 보았다. 소비분석의 알고리즘이 자만과 권위에 빠진 비평가보다 앞으로 더욱 신뢰받을 거야. 모든 권위가 재검토되고 있어. 아마존의 추천목록을 봐. 로르(Laure)는 백년이상의 역사를 가진 출판사 베르퇴이(Bertoy)에서 보수적인 출판사의 흐름을 바꾸고 책들을 전자화하기위해 새로 영입한 직원으로 베르퇴이의 편집자인 알랭(Alain)과 토론을 벌이고 바람도 피운다. 레오나르(Leonard)는 정치인을 보좌하는 아내 발레리(Valerie)를 두고 알랭의 부인인 여배우 셀레나(Selena)와 오랫동안 관계를 맺어왔고 셀레나와의 관계를 변형한 자신의 신작을 베르퇴이에서 출간하려 하지만 알랭은 퇴짜를 놓는다. 그들은 끊임없이 대화를 늘어놓으며 관계라는 픽션 사이를 표류하다 제자리로 돌아간다. 다 변할 거야. 끌려가지 말고 원하는 변화를 선택해. 로르는 알랭과의 관계를 정리하기 전 영화의 대사를 인용한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기 위해선 모든 것이 변해야한다. 한 세계가 끝나가니까? 아마도 거기엔 더 많은 이유들이 있는 것 같아.
DOUBLE NOVELA
마세도니오 페르난데스(Macedonio Fernandez)의 작품세계는 앞으로 쓸 소설에 대한 ‘약속/예고’로만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약속/예고’는 앞으로 발생할 “사건”을 미리 ‘말’로 알리고 약속한다는 점에서 ‘부재’와 ‘무’에 실존의 자리를 부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처럼 끊임없이 연기되는 ‘약속’으로서의 소설은 현재-과거-미래를 뒤섞어 버림으로써 모든 것에 대해 무한히 열려 있는 영원한 존재의 가능성을 모색한다.3) 마세도니오 페르난데스는 많은 글을 썼지만 그걸 책으로 출간하려는 생각이 없었다. 보르헤스는 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마세도니오에겐 문학이 사유보다 덜 중요했고, 출판이 문학보다 덜 중요했다. 마세도니오는 무엇보다 우주 세계를 이해하고 싶어 했고, 자신이 누구인지, 자기가 혹시나 다른 누군가가 아닌지 알기를 원했다. 그에게 있어서 글을 쓰고 이를 책으로 출간하는 것은 부차적인 일에 불과했다”. 실제로 그가 남긴 글들은 생각이 날 때마다 쪽지에 적은 것들이고 자신의 글에 전혀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기에 따로 보관하거나 정리하지도 않아서 보다 못한 동료들이 그가 버린 것들을 보관하거나 나중엔 그의 아들인 아돌포 데 오비에타(Adolfo de obieta)가 모으고 선별한 메모들을 바탕으로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그는 책보다도 주변의 아나키스트들과 함께 파라과이에 아나키즘 공동체를 세우거나 오로지 초현실주의적인 선거운동을 해보겠다는 이유만으로 대통령직에 출마하거나 하는데 골몰했던 것 같다(결과는 당연히 참패였다고). 책을 낸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나는 지나친 의미화가 많은 것을 망가뜨린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아마 내가 별로 하고자 하는 말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까지 잘도 해놓고……) 나는 그저 혼자가 되기 위해 책을 읽었고 정말 혼자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아나키즘에 대해 자주 생각했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직 덜 차린 것 같긴 한데……) 셋 이상이 모이게 되었다. 누군가 갑자기 오즈의 마법사 얘기를 꺼냈는데 그들은 중요한 뭔가가 하나씩 없다. 양철 나무꾼은 심장이 없고 허수아비는 뇌가 없고 도로시는 집이 없고 겁쟁이 사자는 용기가 없다. 용기…… 사실 나는 오즈의 마법사를 본 적이 없는데 그들이 끝내 그것을 다 얻게 되는지 잘 모르겠다. 추측해 보건대 아마 못 얻을 거 같다. 얻으려고 막 하는데 잘 안될 거 같다. 근데 그래도 괜찮아. 못 얻어도 괜찮아. 그치만 꽤 즐거운 여정이었지? 마주 보고 웃으며 하하호호 끝날 것만 같다. 그게 좋은 결말일까? 잘 모르겠다. 언젠가 이여로는 우리에게 노트북으로 다음과 같은 문장을 보여주었다.
Anarchism is when there's feedback and the more feedback you have the more anarchisticy it is. Fascism is when you block feedback and the more feedback you block the more fascist it is. 4)
마세도니오 페르난데스가 생전 출간한 대표작 중 하나는 《눈을 뜨고 있다고 다 깨어있는 것은 아니다》이다. 각자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이 될 수 있을까. 물어볼 수 있다면 이제 이 생각은 당신의 몫이다.
<aside> 🕞 1) 파울 파이어아벤트, 《킬링 타임》, P. 171. 2) 조너선 로젠봄, 《에센셜 시네마》, P. 239. 3) 마세도니오 페르난데스, 《계속되는 무》, P. 125. 4) @mutual_ayyde, 2020년 10월 17일 오전 10:48, Twi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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