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 선조 임금에게 각별한 총애를 받았던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신립 장군이었습니다. 그가 선조의 총애를 받은 이유는 북방의 여진족을 토벌한 혁혁한 전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조련한 기병을 중심으로 여진족들이 국경을 더 이상 침범할 수 없도록 철통같이 방어했습니다. 그렇게 국방의 경계를 늦추지 않았기에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고, 임금에게는 총애를 받습니다.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합니다. 왜군들은 부산진과 동래를 점령하고 파죽지세로 한양을 향해 올라갑니다. 다급해진 선조 임금은 신립 장군을 불러들입니다. 적들이 한양으로 올라오지 못하도록 길목을 차단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신립의 참모들과 부관들은 조령 고개에 군사들을 매복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진언했습니다. 조총으로 무장한 적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험준한 산악 지대에 매복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장군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조령 고개가 아닌 넓은 벌판에서 적을 상대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충주 탄금대에 진영을 정비합니다. 넓은 벌판에서 왜군들과 조선 관군들이 일대 격전을 벌입니다. 하지만 잘못된 판단이었습니다. 왜군들의 조총을 무시한 결정이었습니다.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들에게 넓은 들판은 날개를 달아준 꼴이었습니다. 그 결과 조선군 8천 명이 전사하고, 신립 장군도 남한강에 몸을 던져 최후를 맞이하고 맙니다.
그렇다면 장군은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요? 돌이켜 보면 그는 기병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조련한 기마부대를 한번 써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교만이었습니다. 적들이 조총으로 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습니다. 먼 거리에서 총을 쏘아대는데 기병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교만은 이토록 무서운 것입니다. 자기가 잘하는 것만 생각하고, 적들이 어느 정도의 화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판단하지 못했기 때문에 본인뿐만 아니라 나라도 결국은 위태롭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결국 교만이라는 것은 자신뿐만 아니라 공동체도, 주변 사람들도 위기에 빠뜨립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하나님 말씀을 보면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겸손이 나옵니다. 반대편에는 헤롯의 교만도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를 높이시고 교만한 자의 목을 꺾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겸손을 기뻐하십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정말 겸손한 존재들인지 스스로를 살피고 돌아보며, 겸손이 어떤 의미인지를 살피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세례 요한이 활동하던 시절에 많은 사람들은 권력이 있는 곳으로 모여듭니다. 로마, 가이사랴,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하지만 세례 요한은 빈들에 있었습니다. 빈들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 있는 세례 요한에게 임했고, 세례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선포합니다. 그는 물세례의 형식만 강조한 것이 아니라, 물세례를 받은 이후에 회개해야 하나님의 나라에 이를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탐심을 경계하라고 말했고, 강력한 회개의 메시지를 들었던 사람들이 큰 은혜를 받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빈들에서 세례 요한의 설교를 듣기 위해 몰려들고 또 몰려들었습니다.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 몰려든 사람들이 세례 요한을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생각하니" 사람들은 세례 요한을 보고 오랫동안 바라고 기다렸던 메시아, 그리스도가 아닌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로부터 거슬러 올라가면 약 700년 전부터 메시아의 예언이 있었습니다. 이사야 이후 100년, 예레미야 때도 메시아 예언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 선지자 이후에 나라가 망해 버립니다. 바벨론에 의해서 나라가 망하고 난 다음에 페르시아 시대, 그 이후에 알렉산더 제국의 시대, 알렉산더 제국의 분열의 시대를 거쳐서 지금 로마 시대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그들이 기다리고 고대했던 메시아는 임하지 않습니다. 이분이 메시아인가? 저분이 메시아인가? 그럴 만한 사람조차도 지금까지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의 설교를 듣고 메시지를 들어보니 마음에 울림이 있습니다. 감동이 됩니다. 은혜가 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권력이 있는 곳을 뒤로하고 빈들에 와서 말씀을 듣습니다.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이분이 과연 그리스도가 아닌가? 이분이야말로 메시아가 아닌가? 이구동성으로 외칩니다. 세례 요한에게도 그 이야기가 귀에 들려옵니다.
백성들의 이 말을 듣고 난 이후에 세례 요한의 반응이 이러했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세례 요한은 스스로의 한계를 분명히 압니다. 나는 물세례를 전하는 사람일 뿐이다. 나보다 그 뒤에 오시는 분은 내가 그분의 신발끈을 풀기에도 합당하지 못할 정도인데, 그분은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성령과 불은 세례 요한이 함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 요한은 인간 아닙니까? 인간이 어떻게 성령을 보낼 수 있겠습니까? 성령의 불을 내려보낼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야 성령을 보낼 수 있고, 또 불을 그들에게 내려서 회개시킬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저 한 인간일 뿐입니다. 그는 스스로의 한계를 이렇게 분명히 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원래 사람이라는 존재가 옆에서 부추기기 시작하면 진짜 그런 줄 압니다. 나는 정말 연약하고 부족하고 아무것도 못하는 존재인데, 옆에서 사람들이 "당신이 참 대단하십니다. 그리스도인 것 같습니다. 메시아인 것 같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한두 사람에게 듣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에게 그런 이야기를 듣다 보면 "내가 정말 그리스도인가?" 자기 스스로도 그런 착각과 오만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달랐습니다. 나는 물세례를 베푸는 사람일 뿐이다. 나는 더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면 그분이야말로 성령을 보낼 수 있는 분이라고 자신의 한계를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복음 3장 4절 말씀을 보십시오.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그는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인용해서 말했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이 말씀이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인생 전체를 소리라고 규정했습니다.
소리는 두 가지 의미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소리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첫 번째는 의미의 전달입니다. 의미가 분명하게 전달되어야 그 소리가 소리로서 기능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하나님의 뜻을 세례 요한은 전하는 소리로서 역할을 감당하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러한데, 그 말씀을 왜곡시키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주변의 권력자들의 눈이 그들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이 하나님의 마음을 말씀에 담아서 전하는데 사람들이 힘들어합니다. "회개하라. 도끼가 나뭇뿌리에 놓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이런 말을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겠습니까? 특별히 권력자들이 그를 잡아서 옥에 넣기도 하고, 그를 잡아 죽이려고 하고, 협박도 합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사명과 정체성이 소리이기 때문입니다. 소리는 굽어가지 않습니다. 소리는 왜곡되면 곤란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타인들에게 전달하는데 왜곡되어 전달하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 당시에 소리로서 역할을 해야 되는 사람들도 굉장히 많았습니다. 대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 사두개인, 율법학자들. 그들 모두가 소리로서 기능해야 되는 사람들 아닙니까? 그런데 그들은 소리로서의 역할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대로 그들은 전달하지 않습니다. 소리를 다 왜곡시켰습니다. 들리지 않습니다. 그들의 목소리를 아무리 들어도 그들의 목소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이,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지지 않고 들리지가 않습니다. 하지만 세례 요한은 달랐습니다. 소리로서 사명을 성실하게 감당한 인물이 바로 요한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