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본문: 창세기 49:22-26

고대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Ovidius)는 『변신 이야기』에서 소문의 여신 파마(Fama)를 등장시킵니다. 이 여신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교차하는 지점, 바다와 대지와 하늘이 맞닿는 곳에 궁전을 세웠습니다. 궁전 꼭대기에는 수천 개의 통로와 입구가 뚫려 있었는데, 단 하나의 문도 달려 있지 않았습니다. 소문이 빠르게 왕래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오비디우스가 이 이야기를 통해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첫째, 소문은 어떤 군왕도 어떤 권력자도 막을 수 없을 만큼 강력하기에 신의 자리까지 격상시킨 것입니다. 과거를 통해 현재로, 미래로 흘러가는 소문,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이 사람에서 저 사람에게로 넘어가는 소문을 어떤 권력자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둘째, 소문의 파괴력입니다. 과거에 퍼진 소문이 현재에도 위력을 발휘하고 미래까지 지배합니다. 셋째, 소문에는 뿌리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악의적인 소문이 어디서 왔는지 알 길이 없으나, 그 소문을 만들어내는 근원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묵상하면서 믿음의 사람들의 삶을 돌아보게 됩니다. 악한 소문은 이토록 빠르고 왕성하며 파괴력을 지니는데,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이처럼 민첩하게 움직이고 있는지, 선한 일에 이만한 열심을 다하고 있는지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악한 소문에도 그 숙주가 되는 뿌리가 있다면, 우리 믿음의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고 살아 숨 쉬게 만드는 그 뿌리는 과연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은 야곱이 아들 요셉을 축복하는 장면입니다. 아버지 야곱은 아들의 번성을 바라보면서, 그 뿌리가 하나님께 있었다고, 말씀에 있었다고 선언합니다.

샘 곁에 내린 뿌리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창 49:22)

아버지의 눈에 비친 아들의 인생은 무성한 가지와 같았습니다. 여기서 '무성하다'는 히브리어 '파라'에서 온 말로, 단순히 이파리만 무성한 것이 아니라 열매를 맺다, 결실하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열매가 가득한 가지가 담을 넘어갔습니다. 이것은 아들 요셉의 삶을 축약한 한 폭의 그림입니다. 가나안 땅 헤브론의 시골 소년이었던 요셉이 당대 초강대국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으니, 그의 인생의 가지가 담을 넘어간 것입니다. 담을 넘어간 그 가지의 열매는 보는 이들에게도 좋았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그 열매를 먹고 힘을 얻었으며, 행복과 생명을 누렸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야곱이 주목한 것은 열매가 아니었습니다. 이 많은 열매를 맺고 있는 가지가 어떻게 담을 넘어갈 수 있었는가, 바로 그 뿌리에 주목했습니다. 아버지가 뿌리를 살펴보니, 뿌리가 샘 곁에 있었습니다. 성경은 샘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봅니다. 영원토록 마르지 않고 솟아나는 샘물 같은 하나님의 말씀, 요셉의 인생은 바로 그 말씀 가운데 뿌리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그의 가지가 높이 올라가 담을 넘어서 많은 사람에게 영향력을 미치고, 사람들을 복되게 만드는 좋은 나무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정신입니다.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 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렘 17:7-8)

더위에도 나무가 걱정 없고 가뭄이 오더라도 그 잎이 청청하며 열매를 풍성히 맺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생의 열매에서 중요한 것은 뿌리입니다. 그 뿌리가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에 두고 있는가 아닌가가 관건입니다. 영원토록 솟아나는 샘물 같은 하나님 말씀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 열매는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 인생의 걱정거리들을 떠올려 봅니다. 많은 사람이 염려합니다. 수십 년 한평생을 살았는데 열매가 없다고,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열매도 없어서 자랑할 거리가 없고, 비가시적인 열매도 없어서 내면을 만족시키지 못한다고 한탄합니다. 나는 왜 열매가 없을까, 그래서 열매 때문에 걱정하고 염려하며, 열매를 맺기 위해 힘을 쓰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거꾸로 생각해야 합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뿌리가 시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뿌리만 튼튼하면, 인생의 뿌리가 샘 곁에 있기만 하면, 하나님 말씀에 뿌리를 내리고 살기만 하면, 아무리 땅 위가 메마르고 상황이 좋지 못하더라도 열매는 걱정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환경을 탓합니다. 정치적인 상황, 경제적인 상황, 주변의 불편한 여건들을 탓합니다. 세상이 이래서, 환경이 이래서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뿌리가 깊이 내려가 있는 사람들을 보면, 땅 위가 가물고 메마른 땅이라 하더라도 염려가 없습니다. 그 뿌리가 하나님 말씀과 깊이 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인생이 그러했습니다. 아버지가 보신 그대로, 샘 곁에 뿌리가 내려가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이겨냈습니다. 그가 정욕이 없는 사람이어서 이겨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올바른 도덕적 인물이어서 그 유혹을 견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뿌리가 하나님 말씀에 깊게 내려가 있었기 때문에 견디고 이겨낸 것입니다. 감옥에서 억울한 일을 당해도 그 고통을 견딜 수 있었던 까닭 역시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집트의 총리가 되어 세상이 말하는 입지전적 성공을 거두었을 때에도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성공에 도취되지 않았던 까닭은, 그의 뿌리가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뿌리가 어디에 내려가 있습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말씀에 뿌리를 두어야 우리는 좌우로 흔들리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3장에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네 가지 땅이 등장합니다. 첫 번째 땅은 길가와 같은 마음입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은 단단하게 다져집니다. 거기에 말씀의 씨앗이 떨어져도 뿌리를 내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우선순위를 두지 않고 자신이 하는 일에 매여 분주하게 다니는 사람, 그런 마음에는 하나님 말씀이 뿌리를 내릴 수 없으니 열매 맺는 인생이 될 수 없습니다.

두 번째 마음은 흙이 얕은 돌밭입니다. 말씀의 씨가 떨어져 뿌리를 내리지만, 조금 더 내려가다 보니 큰 바위를 만납니다. 돌을 뚫을 수 없어서 금방 마르고 맙니다. 우리 마음 깊은 곳에 걱정과 염려와 근심이 가득 차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뿌리를 내리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세 번째 마음은 가시떨기와 같은 마음입니다. 가시떨기는 세상의 염려, 물질을 향한 욕심, 재리의 유혹입니다. 이런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지면 가시의 기운이 세어 말씀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만듭니다.

좋은 땅이란 무엇입니까? 우선순위가 하나님 말씀에 정리된 사람, 길가와 같은 분주한 마음이 아니어야 하고, 마음속의 걱정과 염려라는 돌들도 제거해야 하며, 가시떨기도 뽑아내야 합니다. 좋은 땅에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지면 자라서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매를 맺으라고 명령하신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뿌리를 말씀하셨습니다. 샘 곁에 뿌리를 두고, 하나님 말씀에 뿌리를 두고 살아야 열매 맺는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열매를 맺고 싶습니까? 사람마다 맺고 싶은 열매의 종류가 다릅니다. 그런데 어떤 열매를 원하든지 본질은 한 가지입니다. 샘 곁에 뿌리를 두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뿌리를 두고 그 말씀을 중심으로 살다 보면, 때가 되어 하나님이 허락하신 귀하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나도 행복하고, 주님도 기뻐하시고, 주변 사람들도 복되게 할 날이 올 줄로 믿습니다.

전능자의 손을 힘입은 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