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야, 너는

본문: 창세기 49:8-12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은 태조 이성계부터 철종에 이르기까지 25대 임금, 472년간의 재위 기간을 시간의 순서에 따라 기록한 기록물입니다. 세계 어디에도 이에 비견할 기록물이 존재하지 않기에,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기록유산으로 훈민정음과 함께 등재된 기념비적인 유산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의 탁월함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이 무수히 많지만, 그중 단 한 가지만 꼽으라면 그 공정성을 들 수 있습니다. 선조, 현종, 숙종, 경종 임금에 대해서는 실록이 두 가지씩 존재합니다. 당대에 기록된 실록과 후대에 기록된 수정실록이 함께 남아 있는 것입니다. 수정실록이 존재한다는 것은 후대의 사가들이 해당 임금에 대한 기록이 미화되거나 과장되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올바른 역사를 남기기 위해 수정실록을 편찬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그들은 수정실록을 남겼지만 원래의 실록은 폐기하지 않았습니다. 고스란히 보존해 두었습니다. 본래 역사를 기록하는 이들은 권력을 가진 집권 세력입니다. 전 세계 어느 역사를 보더라도 후대의 기록이 완성되면 선대의 기록은 치워버리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자신이 가진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조선의 사가들은 수정실록을 기록하면서도 앞선 역사를 그대로 두었습니다. 그 이유는 역사에 대한 존중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의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수백 년 후에, 수천 년이 지난 다음에 후대가 평가해 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누구의 기록이 옳은지, 이 임금의 삶과 기록을 후대 역사가들이, 후대 백성들이 기억하고 판단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역사에 대한 존중감으로 기록 두 개를 자신 있게 남겨둔 것입니다. 이것이 조선왕조실록의 진정한 가치입니다.

성경은 어떤 책입니까? 우리가 성경을 읽어 가다 보면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도 신격화되거나 미화되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특별히 존경하고 사랑하는 두 인물이 있는데, 아브라함과 다윗입니다. 아브라함은 유대인의 믿음의 조상이요, 다윗 왕은 인간 왕 중에 유대인들이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미화되거나 신격화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잘못과 적나라한 실패와 실수가 성경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의 밧세바(Bathsheba) 사건이 성경에 있는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진리의 말씀으로 믿는 것입니다. 그들이 사랑한다고 해서, 존경하고 따른다고 해서 안타까운 역사를 삭제하거나 지워버리지 않습니다. 인간의 연약함과 부족함과 모자람도 있는 그대로 기록해 두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유다에 대한 아버지 야곱의 축복의 말씀입니다. 유다야말로 예수님의 조상 지파의 우두머리입니다. 유다 지파에서 다윗 왕이 났고, 유다 지파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후대에 힘 있는 사람이 볼 때, 유다야말로 예수님의 조상인데 유다의 부끄러운 기록은 없애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생각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유다의 부끄러운 기록인 창세기 38장은 여전히 그대로 존재합니다. 창세기 38장을 보면 유다는 성급한 인물이요, 이기적인 인물이요, 정욕적인 인물로 묘사됩니다. 어떻게 예수님의 조상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누구도 거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진리의 책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베냐민을 책임지고, 결국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하게 된 이야기, 유다야말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변화된 사람임을 성경은 있는 그대로 기록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유다에 대한 마지막 기록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록도 역시 참된 기록입니다.

이름값하는 인생, 찬송이 된 삶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창 49:8)

아버지 야곱이 유다를 축복하면서 오래전 이야기를 떠올립니다. 아들의 이름을 '찬송'이라고 지었던 어머니 레아의 사건을 기억합니다. 어머니 레아는 아들을 유다까지 네 명을 낳았습니다. 첫 아들은 르우벤, 둘째는 시므온, 셋째는 레위인데, 이 셋 모두 인간적인 자신의 바람을 담은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넷째 아들 유다를 낳고서야 "여호와를 찬송할지라"고 고백했습니다. 유다의 이름의 뜻이 '찬송'이 된 것입니다. "나는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여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아들을 이렇게까지 낳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찬송받으십시오." 그런 마음으로 아들의 이름을 '찬송'이라고 지은 것입니다.

아버지 야곱은 오래전에 부인 레아가 넷째 아들 유다를 낳을 때 그 사건을 떠올리면서 "너는 형제들의 찬송이 될지라"고 칭찬하고 있습니다. "너의 어머니가 너의 이름을 찬송이라고 지었는데, 너는 지금 형제들의 찬송이 되었구나. 너는 너의 이름값을 하며 살았구나." 야곱은 유다를 칭찬합니다. 유다는 형제들의 찬송이 되었습니다. 유다 덕분에 베냐민이 살아났습니다. 유다 덕분에 요셉과 형제들이 화해했습니다. 유다 덕분에 모든 식구가 칠 년의 흉년을 면하고 이곳에서 편안하고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형제들 모두가 유다를 칭찬하고 유다를 찬송합니다. "당신 덕분이라고, 유다 덕분에 우리가 지금 이런 삶을 누리고 있는 것이라"고 칭찬하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런 인생을 우리는 이름값하는 인생이라고 말합니다. 유다의 이름이 찬송인데, 그가 평생을 살면서 자신의 이름에 합당한 인생을 살아낸 것입니다. 아버지는 이것을 칭찬하셨습니다. 이름값하는 인생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에서 사람들의 이름을 바꾸어 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브람을 아브라함이라고 바꾸어 주셨습니다. 아브람은 '존귀한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한 가정의 존귀한 아버지로 사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자기 자녀를 사랑하고 처자식을 건사하며 살면 존귀한 아버지로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아브라함, 곧 열국의 아버지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열국의 아버지는 쉽지 않습니다. 다른 민족들을 품어 안아야 합니다. 섬겨야 합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야곱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야곱은 '남의 뒤꿈치를 잡는 자'라는 뜻입니다. 태어날 때 형 에서의 뒤꿈치를 붙잡고 태어났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그런 인생을 살았고, 살면서 늘 남의 뒤통수를 치고 사기를 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이제 그렇게 살지 말고 이스라엘이 될지라." 한 나라의 국호를 그의 이름으로 붙여 주셨습니다. 스케일이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남에게 사기를 쳐서도, 뒤통수를 쳐서도, 발뒤꿈치를 잡아서도 안 됩니다. 이름이 얼마나 무거운지 모릅니다. 이름값하며 사는 인생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닙니다.

부모는 자녀의 이름을 심사숙고하여 짓습니다. 그런데 그런 육체적인 이름, 부모가 지어 주신 이름 말고 우리에게는 영광된 이름이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우리가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성도로 불러 주셨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무엇입니까? 거룩한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거룩하다, 곧 구별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이름은 구별된 백성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사람들이 바로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우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도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거룩하고 구별된 자로서 행동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세상의 탐욕과 욕심과 욕망에 휩쓸려 살고 있는데, 우리는 과연 무엇을 위해 살고 있습니까? 나는 지금 목적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습니까? 적어도 세상 사람들과는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생각하는 것, 목표하는 것, 발걸음 가는 곳, 나의 언어, 눈빛, 생활, 습관, 이 모두가 구별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성도입니다. 성도의 이름값에 합당한 인생을 살아야 심판 날 하나님 앞에서 칭찬받습니다.

우리는 성도로만 부름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성도로 우리를 부르시고, 각종 다양한 직분 또한 주셨습니다. 대표적인 직분인 집사의 직분을 성경은 이렇게 규정합니다.

"이와 같이 집사들도 정중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히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 (딤전 3:8-9)

집사의 자격이 이렇습니다. 이 중에 한 가지만 살펴봅시다.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라 했습니다. 여기 가서 이 말 하고 저기 가서 저 말 하지 않는 자가 집사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직분의 이름에 합당한 삶입니다. 과연 우리 집사들이 그렇게 살고 있습니까? 집사가 이러한데 장로는 더 무겁고, 목사는 말할 것도 없이 무겁습니다. 우리는 이름 가지기를 좋아합니다. 이른바 명예욕이 있습니다. 집사로, 권사로, 장로로, 목사로 그 이름을 가지기는 좋아하지만, 그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살아내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저 이름만 가지고 뽐내고 위세를 부리려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름값을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그 직분을 주었는데, 내가 너를 그 이름으로 불러 주었는데, 너는 그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살았느냐?" 나중에 심판 날 하나님 앞에서 이 질문을 받는다면 떳떳할 수 있겠습니까? 당당할 수 있겠습니까?

유다의 평생을 다 아는 아버지 야곱이 이제 세상 떠나기 전에 아들을 앉혀 놓고 그를 칭찬합니다. "내가 너의 인생을 보니 넌 수고로웠구나. 잘 살았구나. 넌 정말 너의 어머니가 지어 준 그 이름값을 하며 살았구나. 애썼다. 수고했다." "너는 너의 이름 '찬송'이라는 이름에 합당한 인생을 살아냈구나."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칭찬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직분을 주시고, 사명을 주신 은혜에 보답하는 길은 이름값하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 이렇게 칭찬받는 인생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가는 용기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가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창 4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