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4:17-26)

조지 프레더릭 와츠(George Frederic Watts)라는 사람은 영국의 미켈란젤로라고 불릴 정도로 회화와 조각에 탁월한 재능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그는 여왕이 수여하는 남작 작위를 두 번이나 거절할 정도로 사회적 욕망과 세속적 출세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남긴 수많은 작품 중에서 1886년에 그린 '희망'이라는 작품이 대표작입니다. 이 그림을 자세히 보면 어떤 여인이 지구 위에 앉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하프처럼 보이는 악기를 가지고 있는데, 그 악기의 이름은 리라(λύρα)입니다. 그런데 악기의 줄이 다 끊어지고 한 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여인은 한 줄 남은 악기를 최선을 다해서 연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인은 앞을 보지 못합니다. 흰 붕대가 눈을 감고 있습니다. 여인은 신발도 신지 않은 맨발이고, 남루한 옷차림입니다. 여인을 보면 도대체 이 여인에게 희망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아주 힘겨워 보입니다. 그런데 그림을 자세히 보면 여인 뒤편에서 아주 희미한 별빛이 비치고 있습니다. 작가는 이 별빛을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대신해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실 작가는 이 그림을 발표하기 전에 갓 태어난 딸아이를 잃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아름다운 딸아이가 세상을 떠나고 난 이후에 절망과 낙심과 슬픔 가운데 있다가, 하나님께서 태초에 창조하신 빛이 곧 자신에게 희망이 됨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이 그림을 통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붙잡아야 되겠다고 결심하고 그림을 그려 발표했습니다.

그림이 발표된 이후에 비평가들의 평가는 그리 좋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미국 지도자들은 이 그림을 무척 사랑했습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그의 집무실에 그림의 복제품을 걸어두고 항상 희망을 마음에 새겼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은 1959년에 설교를 통해서 이 그림과 작가를 소개하며,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함을 역설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자신의 퇴임 이후 자서전 제목을 이 그림에서 착안하여 '담대한 희망'이라고 지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렇게 악한 세상을 살고 있는데, 여러분이 살고 있는 세상과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과연 희망을 노래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희망보다는 절망을, 소망보다는 낙심이 훨씬 더 가득한 이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 읽은 하나님 말씀을 보면 인간의 추악함과 죄악과 악함이 적나라하게 나타납니다. 그런데 그 끝자락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희망이 빛나고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희망으로 붙잡게 하시는지 다시 한번 말씀 앞에 서서, 악한 세상 절망 가운데서도 다시 희망을 붙잡는 믿음의 백성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 회개 없는 새출발

가인은 하나님의 회개 요구를 걷어차고, 세 번이나 회개를 요구하셨지만 하나님을 떠나 에덴 동쪽 놋 땅으로 갔습니다. 성을 쌓았습니다. 하나님과 철저하게 단절하고 이제는 혼자 살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 이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이 짧은 한 절 속에 아주 중요한 두 가지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가인이 에덴 동쪽 놋 땅에 가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습니다. 아들의 이름을 에녹이라고 지었습니다. 에녹이라는 이름의 뜻은 '시작하다', '다시 출발하다'라는 동사에서 파생한 단어입니다. 그가 아들의 이름을 '다시 시작하다', '출발하다'라는 뜻으로 지은 것은 그의 마음의 결심을 대변합니다. 그는 살인자 아닙니까? 동생을 무참하게 죽인 사람입니다. 동생을 죽이고 나서 그는 죄의식과 죄책감 가운데 시달리며 살았습니다. 이제 그는 그런 인생을 정리하고 다시는 과거 같은 생활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새출발하고 싶은 간절한 의지를 그의 아들의 이름을 에녹이라고 지음으로써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가 아들의 이름을 에녹이라고 지었다고 해서 새출발이 가능할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 그를 축복하시고 "그래, 너 이제 새출발하더라. 아들의 이름을 에녹이라고 지었으니까 너는 새출발하기에 내가 축복하며 박수 쳐 주마" 하고 말씀하셨겠습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새출발은 회개하지 않으면 결단코 불가능합니다. 회개해야 새출발할 수 있는 것이지, 하나님이 그에게 세 번이나 회개할 기회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회개 요구를 철저하게 거절한 그가 아들의 이름을 에녹이라고 지었다고 해서, 그가 거주지를 바꾸었다고 해서 어떻게 새출발이 가능하겠습니까?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살아가다 보면 죄를 지을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연약해서 사탄의 꾀임에 빠져서 죄 가운데 들어갈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치 않는 길과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갈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회개하지 않으면 우리가 어떤 발버둥을 친다 하더라도 새출발은 불가능합니다. 집을 바꾸고 차를 바꾸고 옷을 갈아입고 이름을 바꾸고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 가서 산다 할지라도 새출발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이미 다 알고 계시고 하나님이 다 보고 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가인이 하나님 없는 곳으로 가겠다고 생각하고 에덴 동쪽 놋 땅에 가서 성을 짓고 자신의 아들의 이름을 에녹이라 하고 새출발하겠다고 결단한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어떤 일이 있든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일을 했다면 회개하고 다시 한번 새출발할 수 있는 믿음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1. 이중성의 문제

동시에 이 짧은 말씀이 주는 두 번째 의미가 있습니다. 그는 아들의 이름을 에녹이라고 짓고, 그리고 성의 이름도 아들의 이름과 함께 에녹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그 아들을 지극히 사랑한다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성을 쌓았는데 성의 이름을 아들의 이름과 똑같이 만들지 않았습니까? 이중성입니다. 그는 동생을 죽인 사람입니다. 아벨을 죽였습니다. 들에 있을 때 무참히 돌로 쳐 죽였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것 알면서도 자신의 부모인 아담과 하와가 가슴을 찢으며 슬퍼할 일입니다. 생명을 경시한 것입니다.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자신이 낳은 아들은 끔찍이 아끼고 사랑합니다.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할 정도로 그는 아들을 사랑했습니다. 이율배반입니다. 혐오스럽고 역겹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정치를 싫어합니다. 정치 혐오에 많은 사람들이 빠져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실 정치는 효능감이 있는 것입니다. 좋은 정치는 세상을 바꾸지 않습니까? 좋은 정치인은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고 새로운 세상을 약속해 줍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대 우리가 정치를 싫어하는 이유는 그들의 이중성 때문입니다. 자신에게는 한없이 관대하고 국민들에게는 한없이 엄격한 그들의 이중성이 우리를 신물 나게 하고 힘겹게 만듭니다.

오늘 이 시대 많은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납니다. 교회 밖으로 나간 젊은이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심층 조사를 했는데, 왜 교회를 나가느냐고 그랬더니 그들이 종교지도자, 목회자들의 이중성과 중직들의 이중성에 신물이 난다고 말했습니다. 목회자가 강단에서 전하는 말씀과 그들의 삶이 다르고, 교회 중직들의 말과 그들의 행위가 다르고, 자신의 부모가 교회에서 하는 행동과 가정에서 하는 행동과 말이 다르기 때문에, 이렇게 역겨우며 지긋지긋한 이중성이 있는 교회 생활을 더 이상 할 수가 없다고 세상으로 나가버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인 아닙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은 삶이 단순해야 됩니다. 겉사람과 속사람이 일치되어야 됩니다. 성경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알려 주신 말씀, 그 말씀을 붙잡고 세상 가운데 나가서도 그대로 살아 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 제대로 된 진리의 말씀이라면, 우리가 아멘 했다면 교회 안의 삶과 교회 밖의 삶이 일치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9장 26절과 27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며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라"

바울이 수많은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가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을 전도했습니다. 바울이 강단에서 전한 말씀의 양이 엄청나지 않겠습니까?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도리어 그가 전한 말씀대로 그가 제대로 살지 못해서 그가 오히려 하나님께 버림받을까 봐 그는 그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자신이 전한 말씀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그대로 살려고 발버둥 치고 애쓰고 힘썼다고 주장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목회자는 강단에서 전한 말씀대로 살아야 되고, 교회 중직은 배운 말씀대로 실천하고 살아야 되고, 가정의 부모는 교회 안에 행동과 교회 밖의 행동과 가정에서의 행동이 일치되어야 됩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인을 욕합니다. 이중인격자라고, 이율배반이라고. 그러나 사실 우리도 가인처럼 똑같이 이중성을 가지고 역겹고 혐오스러운 인생을 살고 있다면, 우리가 가인을 비난할 자격이 있겠습니까? 주께서 주신 말씀대로 그 말씀 붙잡고 진리의 말씀 오직 한 길을 걸어가시는 하나님의 자녀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