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창세기 48:1-22
더닝-크루거 효과(Dunning-Kruger Effect)라는 심리학 용어가 있습니다. 능력은 보잘것없는데 스스로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현상을 가리킵니다. 더닝과 크루거는 미국의 사회심리학자들로, 코넬대(Cornell University) 학생들을 대상으로 간단한 시험을 치렀습니다. 석차를 내고 평가를 했는데, 하위 25%에 속하는 학생들은 평균 9.6개를 맞혔습니다. 그런데 자기들이 생각하기에는 14개 이상을 맞힌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석차도 평균 88등 정도 되었는데, 이들은 스스로 32등 정도 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더닝-크루거 효과를 자녀들을 키우면서 숱하게 경험했습니다. 시험만 보면 잘 봤다고 합니다. 이번에는 기대해도 좋다며, 자신을 좀 믿어보라고 합니다. 그런데 결과를 보면 참담하지 않습니까? 문제는 내가 무엇을 틀렸는지도 모르고, 내가 모르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학생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 우리 각자에게도 크고 작게 펼쳐지고 있습니다. 내가 아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여기에 대해서는 전문가라고 생각하고 모르는 것이 없다고 여깁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까? 지식의 확장을 위해 노력하지 않고 수고하지 않으려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생각해 보면 알고리즘(Algorithm) 효과를 경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는 것, 내가 관심 있는 분야가 계속해서 노출됩니다. 그러면 끊임없이 내 마음에 편향적 인상이 형성됩니다. 그래서 내가 경험하는 것의 반대편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경험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지식의 확장을 위해 애쓰고 수고하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데 다 아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는 어떠합니까? 성경은 한 부분만 읽어서는 곤란합니다. 신구약을 통틀어서 읽어야 하고, 한 가지 개념만 가지고 전체를 안다고 호도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야곱이 요셉의 아들, 곧 야곱의 손자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축복하는 장면입니다. 성경의 축복은 이 장면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 부분만 가지고 성경에 나오는 모든 축복을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창세기로 범위를 넓혀야 하고, 성경 전체의 맥락 속에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깨달아야 우리는 종합적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살피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내가 애굽으로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애굽에서 네가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것이 될 것이요" (창 48:5)
사실 이 말씀을 그냥 그대로,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야곱이 자기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해하기 쉽습니다. 이 할아버지가 자기 손자를 자기 아들로 입양하려고 하시는가, 그렇게 생각하기 쉽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야곱의 진심이 그다음에 나옵니다.
"요셉이 그의 아버지에게 아뢰되 이는 하나님이 여기서 내게 주신 아들들이니이다 아버지가 이르되 그들을 데리고 내 앞으로 나아오라 내가 그들에게 축복하리라" (창 48:9)
이것이 야곱의 진심이었습니다. 두 손자를 축복하겠다는 것, 그러니 데리고 나오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축복을 하려면 손자들을 모두 축복해야 합니다. 야곱의 손자들이 한둘이 아니지 않습니까? 수많은 손자들을 다 데리고 나오라, 내가 오늘을 잡아서 이 아이들을 모두 축복하겠다, 이래야 말이 되는데 다른 손자들에게는 별 관심이 없고 요셉이 낳은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만 데리고 오라, 내가 이들에게 축복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야곱이 이렇게 말한 것은 요셉에게 장자권을 부여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미 가나안 땅에 살 때부터 열일곱 살 소년 요셉에게 채색옷을 지어 입혔습니다. 채색옷을 입고 노동의 면제를 부여받았습니다. 너는 지금부터 이미 형제보다 뛰어난 자이며, 나는 너를 장자로 인정한다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세월이 한참 지났습니다. 이제 여기서 못을 박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다른 형제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우선 현실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 누구 덕분에 여기 살고 있습니까? 요셉 덕분에 흉년의 7년을 잘 보냈고, 아무런 문제 없이 왕의 가축을 양육하며 잘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현실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고, 또 한 가지는 아버지가 수십 년 동안 요셉에게 장자권을 주고자 했으니 이제는 아버지 뜻대로 하게끔 내버려 두자, 우리 마음에 좀 들지 않아도 아버지가 그렇게 하시겠다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자, 그런 마음도 자식들에게 왜 없었겠습니까?
율법에 의하면 장자권을 부여받은 사람은 두 배의 몫을 받습니다.
"자기의 소유를 그 아들들에게 기업으로 나누는 날에 그 사랑을 받는 자의 아들로 장자를 삼아 참 장자 곧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보다 앞세우지 말고 반드시 그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을 장자로 인정하여 자기의 소유에서 그에게는 두 몫을 줄 것이니 그는 자기의 기력의 시작이라 장자의 권리가 그에게 있음이니라" (신 21:16-17)
장자에게 두 몫을 주라고 하지 않습니까? 요셉의 두 아들을 데리고 와서 그 두 아들에게 축복하는 것은 두 몫을 주겠다는 뜻입니다. 이제 이 가정의 장자권은 요셉에게 흘러간다는 선언입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선택이었습니다. 아들 중에 요셉을 공식적으로 장자로 세우겠노라는 선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과연 그렇게 생각하셨을까요?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은 이러하니라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의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가서 족보에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되지 못하였느니라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에게서 났으나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 (대상 5:1-2)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갔습니다. 이유는 아버지가 요셉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특별한 말씀이 나옵니다. 주권자가 유다에게서 났다고 했습니다. 이 주권자가 누구입니까? 인간 중의 주권자는 이스라엘이 탁월하게 아끼고 사랑하는 왕 다윗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이었습니다. 다윗의 치세에서 이스라엘은 영화를 누렸습니다. 영토는 가장 넓게 확장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인간 왕 다윗이 핵심이 아닙니다.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죄의 문제와 죽음의 문제,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가, 피 흘리시고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유다의 자손 중에 주권자로 오시지 않았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