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창세기 47:7-8
고대 사회의 민간에는 남을 저주하는 주술 문화가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중국에서도 그러했고, 중국의 영향을 받은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중국을 거쳐 조선 사회에 유행했던 민간 저주 주술 가운데 '고독(蠱毒)'이라는 주술이 있었습니다. 벌레 고(蠱)에 독 독(毒)을 쓰는 고독입니다. 그 주술 방법은 이렇습니다. 거대한 항아리를 하나 준비한 뒤, 그 안에 각종 독을 가진 벌레들을 최대한 모아 집어넣습니다. 거기에 파충류 몇 마리도 함께 넣은 다음, 뚜껑을 꼭 닫아 며칠을 둡니다. 그리고 나서 뚜껑을 열면 어떤 일이 벌어져 있겠습니까. 모두 죽어 있거나 한 마리만 살아남습니다. 모두 죽어버리면 주술이 실패한 것이고, 한 마리가 살아남으면 그것을 꺼내어 불에 태워 가루를 만듭니다. 그 가루를 저주하고 싶은 사람의 음식에 타서 먹이는 것입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실제로 그 가루를 먹고 사람이 죽느냐 죽지 않느냐의 여부를 떠나서, 이것은 그 자체로 소름 끼치는 악행입니다. 그래서 조선 사회에서는 고독의 주술을 사용하다가 발각되면 엄벌에 처했습니다. 사면도 해주지 않을 만큼 중죄로 다스렸습니다.
사람이 이처럼 악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본성이 이토록 악하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사람은 본성적으로 누군가가 잘되는 것을 눈뜨고 보지 못합니다. 누군가 성장하고 형통하면 축복하고 진심으로 축하해 주어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웬만하면 깎아내리려 하고, 흠집을 잡으려 합니다. 심지어는 자신이 가진 모든 살기를 동원해서 그 사람을 해하려고까지 합니다. 이것이 주술에 드러난 인간의 악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입고 주님의 보혈로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은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믿음의 백성이 가진 특징 가운데 하나가 바로 상대방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잘되기를 빌어주고 복을 빌며 축복하는 것, 이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하나님의 말씀에는 야곱이 바로를 축복한 장면이 등장합니다. 이 본문을 통해 인생의 연약함과 악함을 돌아보고, 우리도 누군가를 위해 축복하며 복을 비는 사람이 되는 은혜를 결단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흉년이 2년째 지나고 아직 5년이나 남아 있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와 가족들을 이집트로 데려왔습니다. 요셉은 대단히 지혜로운 인물이었습니다. 흉년의 시기에 가족 70여 명이 이집트에 와서 산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미리 헤아렸습니다. 그래서 형제들에게 바로 앞에서 할 말을 미리 일러주었습니다. 형제들은 바로에게 분명히 말했습니다. "우리는 목축업자로서 이곳에 온 것이지, 이집트 사람들의 직업이나 관직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결혼을 통한 신분 상승도 바라지 않습니다." 바로는 이에 대한 응답으로 자신의 가축을 치게 하여 야곱의 가족들을 공식적으로 보호해 주었습니다.
형제들이 바로를 만나는 장면이 끝나고, 이제 가족의 대표인 야곱이 바로에게 인사하러 나갑니다. 요셉이 자기 아버지를 모시고 바로 앞에 섰습니다.
"요셉이 자기 아버지 야곱을 인도하여 바로 앞에 서게 하니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매" (창 47:7)
이 장면을 상상해 보면, 요셉이 당황했을 법합니다. 요셉은 지혜롭고 치밀한 인물이었습니다. 형제들에게 바로 앞에서 할 말을 미리 알려줄 정도로 세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갑자기 바로에게 축복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형태로 축복했을까요. 성경에 나타나는 축복의 형태는 다양합니다. 족장인 아버지가 자녀를 축복할 때는 자녀를 앞에 앉히고 머리에 손을 얹어 안수기도를 해줍니다. 또는 믿는 사람들끼리 한자리에 모여 식탁의 교제를 나누면서 눈을 감고 하나님을 향해 기도한 뒤,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을 빌어 줍니다. 그러나 야곱이 바로에게 그런 형태의 축복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현실적으로 바로를 무릎 꿇릴 수도 없고, 머리에 손을 얹을 수도 없으며,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모두 눈을 감으라고 한 뒤 축복기도를 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복을 빌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야곱이 누군가에게 축복했다는 사실 그 자체입니다. 야곱의 이력을 살펴보면 그 의미가 분명히 드러납니다. 야곱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남에게 복을 빈 적이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야곱의 이야기가 창세기에서 대단히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만, 그는 남의 복을 가로챈 사람이었고 복을 갈망했던 사람이었을 뿐, 자기 입으로 누구도 축복하지 않았던 인물입니다.
야곱은 형 에서의 복을 가로챘습니다.
"야곱이 아버지에게 대답하되 나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명하신 대로 내가 하였사오니 원하건대 일어나 앉아서 내가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아버지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 (창 27:19)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아버지에게 복을 받기 위해 에서의 옷을 입고, 눈이 어두운 아버지 앞에 가서 "제가 아버지의 맏아들입니다"라고 속였습니다. 사냥한 고기를 마음껏 잡수시고 축복해 달라고 거짓말한 것입니다. 남의 복을 가로챈 인물, 복을 지나치게 갈망한 나머지 형의 장자권까지 빼앗은 인물이 야곱이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야곱은 하나님 앞에서도 복을 갈구했습니다. 얍복 강에서 하나님과 씨름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 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창 32:26)
이 정도로 야곱은 복을 사모했습니다. 하나님을 붙잡고 놓지 않으며 축복해 달라고 매달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이름을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복을 사모하는 것 자체는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복 받기를 원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이겠습니까. 그러나 남을 속였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다양한 형태로 다양한 사람들을 속이고 거짓말했습니다.
어쨌든 야곱은 그렇게 해서 복을 받고 그 복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문제는 복을 받아 평생 동안 움켜쥐고만 살았을 뿐, 한 번도 복을 베풀어 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130세가 될 때까지 성경을 보면 그가 두 차례에 걸쳐 남에게 복을 비는 장면이 나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이 그 첫 번째이고, 두 번째가 자식들을 침상 위에 모두 불러놓고 세상을 떠나기 전에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부르며 축복한 장면입니다. 결론적으로, 피붙이가 아닌 사람을 축복한 것은 바로에게 한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