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막 4:21-25)

대한민국에서 공부하는 학생들과 직장인 치고 영어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영어를 열심히 하고 싶고 잘하고 싶고 외국어로 소통하고 싶은데, 마음먹은 대로 잘 되지 않습니다. 귀가 뚫려야 된다고 해서 미국 드라마를 보고, 스마트폰에 외국인들이 대화하는 것을 담아서 하루 종일 귀에 꽂고 다닙니다. CNN도 열심히 듣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절망합니다. 나는 안 되나 보다, 아무리 해도 귀가 열리지 않는구나 하고 낙심합니다. 입이 열려야 된다고 해서 비싼 돈을 들여 외국어 학원에 등록합니다.

그리고 얼마 가지 못해서 굉장히 부담을 느낍니다. 나는 단답형으로 yes, no로 대답하고 싶은데 외국인 강사가 풀 센텐스로 길게 대답하라고 합니다. 아침이 되면 부담스럽습니다. 가기가 싫어집니다. 그래서 금방 포기합니다. 연초만 되면 다시 영어를 해보겠다고 하다가 또 포기하고 또 절망하는 세월이 십수 년째 이어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완벽한 공부법"이라는 책에 보면 영어를 공부하는 방법을 고전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두 가지를 말하고 있는데, 그 첫 번째가 문법입니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은 문법을 익히고 공부해야 한다고 적혀 있습니다. 아니, 문법은 너무 고루하고 지루하지 않습니까?

라고 질문할 수 있는데, 그 책에 의하면 미국인들이 사고하는 방식과 그들의 삶의 태도와 사고 구조가 언어의 문법 속에 다 녹아 있기 때문에 문법을 열심히 익혀야 영어에 성공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나서 두 번째 말하는 것이 단어입니다. 책을 한 페이지 읽는데 모르는 단어가 수십 개가 나오면 어떻게 읽겠습니까? 단어를 찾아서 읽는 것도 한두 개지, 20개, 30개 이상의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금방 지치고 포기해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평소에 단어 공부를 열심히 해서 단어를 많이 외워 놓으면 책 읽기가 수월합니다. 정말 문법을 열심히 공부하고 단어를 제대로 익혀서 다시 영어를 들어보면 신기하게도 들립니다. 책을 읽어보면 신기하게도 술술 넘어가고 읽힙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하나님과 우리 인간과의 소통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날 때부터 원죄를 가지고 태어났고 죄악의 관성을 가지고 지금도 죄 때문에 버거워하고 힘겨워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 언어로 하나님께 계속 말하고 하나님께 계속 외치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알아듣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문법과 하나님의 단어 사용이 우리의 문법과 우리의 단어 사용과 너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언어를 알아듣기 위해서, 하나님과 깊은 영적인 소통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문법 체계를 잘 익혀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단어 사용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다시 하나님 앞에 엎드리면, 그리고 다시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말씀을 통해서 영적인 깊은 진리를 깨닫고 영적 풍요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제 가운데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풍성한 영적 생활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한 지침이 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 이전에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네 가지 마음이 있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길가와 같은 마음, 흙이 얕은 돌밭 같은 마음, 가시덤불 같은 마음, 좋은 땅과 같은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좋은 땅에 떨어져야 30배, 60배, 100배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을 잘 갈고 잘 기경해서 좋은 땅과 같은 마음을 가져야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하시는 말씀이 등불을 말씀하십니다. 2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에나 평상 아래에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등불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등불을 켜는 사람은 이것을 말 아래 두거나 평상 아래 두어서 감추려고 등불을 켜지 않습니다. 등불을 켜는 사람은 등경 위에다 두고 이 불빛이 널리 그리고 멀리 뻗어나가도록 하기 위해서 등불을 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이유,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해서 예수님을 통해서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목회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이유는 이 말씀이 사람들에게 널리 그리고 멀리 뻗어나가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원래 의도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마음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알아듣기 위해서는 귀가 필요합니다. 23절 말씀을 보십시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여기서 들을 귀가 무엇이겠습니까? 생물학적인 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태도, 마음가짐, 열정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마음가짐과 태도와 열정이 마음속에 있으면 그다음에는 방법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인가? 여기서 서두에 말씀드린 하나님의 문법을 알고 하나님의 단어 사용을 익히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문법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 아주 중요한 것 몇 가지만 함께 나누겠습니다.

1. 하나님의 문법

1-1. 사랑의 문법

그 첫 번째가 사랑의 문법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이유만 보더라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죄악 가운데 신음하고 죽어가는 우리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말씀과 행동과 모든 태도들은 사람을 사랑하시고 우리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신 말씀과 행동들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행동은 사랑으로 수렴됩니다. 사랑을 빼고서는 예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행동 어떤 것도 이해할 수 없고 해석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독설도 많이 하셨습니다. 서기관들, 바리새인들, 종교 지도자들에게 우리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다."

만약에 우리가 사랑의 문법을 배제하고 이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 어떻게 저렇게 독한 말씀을 하실까, 왜 저렇게 독설을 하실까 오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강팍하고 완악한 종교 지도자들에게 독설을 말씀하시므로 그들의 마음이 뒤집어지고 그들의 영혼이 정결하게 되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행동이 때로는 과격하기도 했습니다.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다 내쫓았습니다. 상을 뒤집어엎으셨습니다. 돈 바꾸는 사람들을 다 내모셨습니다. 성전 정화 사건입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예수님의 이 행동만 보면 어떻게 저렇게 예수님이 과격하실 수 있나 오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진심이 사랑의 문법이라는 것으로 이해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셨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토록 사랑하시는 이 성전이 하나님의 기도하는 집이었기 때문에 주님은 성전에서 장사하는 장사치들을 과격한 행동으로 다 내쫓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직접적 사랑으로 표현하시기도 했습니다.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살려주기도 하셨고, 장사 지낸 지 나흘 되는 나사로도 다시 살려서 가족에게 돌려보내기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는 예수님의 이 사랑의 문법을 오해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빌립입니다. 예수님이 하루는 벳새다 들녘에서 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설교하셨습니다. 하루 종일 말씀을 전하셨는데 저녁이 됩니다. 사람들이 배고파하는 것이 보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이 사람들을 어떻게 먹일 수 있을까?

빌립이 이렇게 말합니다. 머리가 좋은 빌립이라서 이 사람들에게 조금씩 거두어도 200데나리온어치의 돈이 부족합니다. 이 사람들을 먹이는 것은 불가능하니 다 보내서 동네 가서 먹고 다시 오게 하십시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보내지 마라.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사랑의 문법을 배제하고 이 말씀을 들으면 예수님이 제정신이 아닌 것입니다. 줄 것이 있어야죠. 먹일 것이 있어야죠. 털어봐야 아무것도 없는데 어떻게 이 사람들을 먹인다는 말입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사랑의 문법으로 이 말씀을 이해하면 긍휼한 마음, 목자의 심정을 가지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어떻게든지 여기 모인 사람들을 하나라도 먹이려고 애써 보라, 너희들 마음에 정말 목자의 심정이 있느냐, 너희들 마음에 이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느냐라고 물으시는 주님의 사랑의 문법으로 이 말씀을 읽어야 된다는 뜻입니다.

빌립은 사랑의 문법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과 평행선을 달린 것입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수난 예고를 하셨습니다. 내가 고난받고 매 맞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3일 만에 부활할 것이다. 베드로가 주님의 앞을 막아섭니다. 주여, 결코 이런 일이 주님께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화내셨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구나." 예수님은 사랑의 언어로 내가 죽어야만 이 영혼들을 구원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베드로는 인간의 언어로, 세상의 언어로, 자신의 문법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판단하고 오해한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로 합일될 리가 없습니다. 접점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인생도 우리 인생에 주어지는 수많은 난관들과 어려운 일들을 우리 하나님의 사랑의 문법으로 다시 한번 재해석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읽으실 때도 기도하실 때도 사랑의 문법으로, 사랑의 눈을 가지고 성경을 읽어보신다면 이해되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고난과 어려움의 가시밭길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이런 일을 주시고 이런 사람을 만나게 하시고 이런 어려움을 겪게 하시는구나 생각하면 주님의 그 사랑에 우리는 오히려 무릎을 꿇을 것입니다. 사랑의 문법으로 주님을 이해하지 않으면 우리는 믿음이 한 치도 성장할 수 없습니다.

1-2. 믿음의 문법

두 번째로 우리가 이해해야 되는 문법은 믿음의 문법입니다. 성경을 읽어보실 때 믿음의 눈으로 보지 않으면 성경은 하나도 이해되지 않습니다. 흘러내려가는 요단 강물, 창일하는 요단 강물에 사람이 어떻게 발을 담그겠습니까? 쓸려 내려갈 수밖에 없는데 믿음으로 요단 강에 발을 담그라, 그러면 요단 강이 멈춰질 것이다. 여리고 성을 하루에 한 바퀴씩 돌고 마지막 날 7바퀴 돌면 성이 무너져 내린다 하셨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이 말씀을 보고 믿음의 귀로 이 말씀을 듣지 않으면 정신 나간 소리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하루에 한 바퀴씩만 도는데 성이 무너져 내리겠습니까? 하나님의 창조도, 예수님의 고난도, 죽으심도, 부활도, 성경에 나오는 모든 사건도 믿음의 눈으로, 믿음의 문법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성경은 하나의 판타지 소설에 불과합니다. 하나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이해하고 영적인 풍성함과 부유함을 누리기 위해서는 믿음의 문법이 정말 중요합니다.

우리 인생에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경험의 문법을 가지고 내 인생을 해석합니다. 내가 살아보니까 야, 이건 아닌 것 같아. 내가 살아보니까 이렇게 해야 되는 것 같아. 그렇게 충고하고 그렇게 다가갑니다. 하지만 경험의 문법은 한계에 금방 부딪힙니다. 인간의 경험이 일천하기 때문입니다. 경험의 문법을 뛰어넘는 믿음의 문법으로 우리 인생을 접근하십시오. 믿음의 문법으로 성경을 바라보십시오. 새롭게 보일 것입니다. 새롭게 이해되고 새로운 눈이 활짝 열릴 것입니다. 영적인 부유함을 누리게 될 것이고 믿음은 자라고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1-3. 소망의 문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