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하여 우리에게 (눅 2:48-52)

과거 우리나라 가정에서는 자녀를 적어도 셋 이상씩 낳아 길렀습니다. 그 아이들이 동네에 나가 함께 뛰어놀고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서로 티격태격하며 싸우기도 하고 그 안에서 질서가 생겨났습니다. 그러므로 아이들의 사회성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많은 아이들이 가정에서도, 동네에서도, 학교에서도 자연스럽게 질서를 배워나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가정에서 자녀를 많이 낳지 않습니다. 주거문화는 아파트문화로 바뀌었습니다. 학원을 보내지 않는 가정은 이제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사회화를 경험하고 사회성을 배울 수 있는 공간이 이전보다 현저히 줄어들었습니다.

이제는 우리 자녀들의 사회성이 문제가 되는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전문가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마치 국어, 영어, 수학을 배워야 하는 것처럼 자녀들의 사회화도, 그들의 사회성도 이제는 익히고 배워야 하는 시대가 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비단 우리 자녀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녀들이 사회성을 누구에게 배우겠습니까? 부모를 통해서 배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부모가 마음을 열고 자녀들과 적극적으로 의사소통하고, 그들을 공감하고, 그들과 갈등을 해결하고, 협력하지 않으면 자녀들의 사회성은 길러지기 어렵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 부모가 자녀를 자기 소유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 소유로 생각하는 순간, 아이들과의 상호 협력과 의사소통과 감정 조절은 의미가 없어집니다. 이미 내 것인데 내가 왜 굳이 힘을 들여가며 자녀들과 감정을 조절하고 의사소통하려 하겠습니까? 그래서 가정의 많은 문제들, 우리 자녀들에게 일어나는 수많은 문제들은 부모가 자기 자녀를 소유물로 생각하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거기에서부터 갈등이 촉발된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하나님 말씀을 보면 요셉과 마리아도 자녀 교육을 훌륭하고 충실하게 잘한 가정입니다. 그런데 은연중에, 결정적인 순간에 자기 자녀를 소유물로 생각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어디 자녀 문제뿐이겠습니까?

우리 주변에 살아가는 모든 것,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이 모든 것들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청지기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야 우리 인생의 많은 문제들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과연 청지기 의식을 가지고 살고 있는지 스스로 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소유 의식과 청지기 정신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아버지 요셉은 철저하게 말씀 중심으로 사는 분들이었습니다. 어떤 상황이나 환경보다 하나님 말씀이 그들의 삶의 중심에 서 있었습니다. 매년 유월절이 되면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멀리 예루살렘까지, 자신의 경제적 불이익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다녔습니다.

철저하게 자녀를 신앙으로 훈련하고 교육했습니다. 지금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열두 살 되던 해 유월절에 문제가 생깁니다. 아이가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돌아보아도 없습니다. 일행 중에 없었습니다. 뒤돌아 뒤돌아 가보니 성전에서 랍비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듣기도 하시고 묻기도 하시면서 하나님 말씀을 토론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 또 얼마나 미웠겠습니까? 얼마나 화가 났겠습니까? 아이를 보고 어머니가 한 말입니다. 48절을 보십시오. "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상당히 품위 있는 어머니가 아닙니까?

만약 우리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당장 등짝을 때리고 멱살을 잡고, 하고 싶은 말 있는 말 없는 말, 욕설을 내뱉는 등 이 모든 것을 다 한꺼번에 하는 부모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우리 같으면 있는 감정을 다 쏟아부어서, 화나는 것을 3일 만에 찾은 아들에게 성질대로 다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어머니 마리아는 상당히 품위가 있습니다.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며 너를 찾았노라." 상당히 기품 있는 어머니가 아닙니까?

1-1. “아이야”

그런데 그렇게만 볼 것이 아닙니다. 어머니 마리아가 한 말 속에서 우리는 그분의 진심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이야"라는 말입니다. 보통 '아이'라는 말에 헬라어로 파이디온(παιδίον)이라는 말을 씁니다. 어린아이라는 말의 총칭입니다. 남자아이, 여자아이, 여기서는 가치중립적인 단어입니다.

어린이들을 다 파이디온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파이디온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습니다. 테크논(τέκνον)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아이야"라는 말에 이 테크논이라는 말의 동사 형태가 틱토(τίκτω)인데, 이 말은 산고를 겪다, 어려움을 겪고 출산하다라는 뜻입니다. 즉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내가 너를 죽을 뻔하며 낳았는데,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네가 나에게 이렇게 할 수 있단 말이냐"라는 뜻입니다. "내가 너 배 아파서 낳았는데, 태중에 열 달이나 있었는데, 내가 너 때문에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얼마나 많이 받았는 줄 아느냐. 그런데 네가 어떻게 나에게 이렇게 할 수 있단 말이냐"라는 말이 테크논(τέκνον)이라는 말 속에 그대로 녹아 있습니다.

애정이 담긴 말이면서 동시에 강한 소유가 함께 내포되어 있는 말입니다. "넌 내 것인데 어떻게 네가 나에게 이렇게 할 수 있느냐,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할 수 있느냐"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여기에 마리아가 평소에 이 아들을 어떻게 생각했는지가 강하게 드러나지 않습니까? 내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내 것이라고.

그런데 마리아도 알고 있습니다.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수태고지를 받지 않았습니까? 결혼도 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되어 아기를 가졌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아들입니다. 700년 전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했던 그 아이입니다. 그러므로 내 소유가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누구보다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마리아입니다.

1-2. 하나님의 기업

그런데 이 마리아도 12년 동안 이 아이를 길러가면서 자기도 모르게 이 아이가 내 것이라고 생각해 버린 것입니다. 은연중에 결정적인 순간에 이 아이에 대한 소유권이 하나님에게 있지 않고 나에게 있다는 말을 해버리지 않습니까? 시편 127편 3절을 보면 "자식은 여호와의 기업"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의 기업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기업입니다. 하나님의 기업인데 왜 나에게 주셨습니까? 내가 청지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를 기르는 청지기로 세우셨습니다. 때가 되어서 하나님의 기업을 나에게 선물로 주시고 잘 키워 달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셨습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 잘 키웠습니다. 하나님께서 뜻하신 바대로 길렀습니다. 하나님 뜻대로 이제는 사용하십시오"하고 내어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자식은 나의 기업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업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몇 세에 낳았는지 알고 있습니다. 백 세에 낳지 않았습니까?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을 때 그의 상태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남자로서의 기력이 다 쇠했습니다.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건강 상태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사라는 또 어떻습니까? 여성으로서의 경수가 끊어진 상태였습니다. 아이를 출산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해서 이삭을 주셨습니다. 그러면 누구의 아들입니까? 이 아들은 내 아들이 아니라 그 소유가 분명히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유된 아들이 바로 이삭입니다. 아브라함도 알고 있습니다. 내가 이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중에 낳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삭을 마치 내 것처럼, 내 것인 양 그렇게 길렀습니다. 하나님이 가만히 두고 보지 않으십니다. 소유권의 문제를 분명히 하자. 이 아이가 네 것이냐, 내 것이냐. 창세기 22장 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을 비꼬는 말입니다. 내 것인데 마치 너는 너의 아들인 것처럼, 네가 사랑하는 독자인 것처럼 그렇게 살고 있구나. 모리아 산으로 데리고 와라. 소유가 누구에게 있는지 분명히 한번 밝혀보자.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에 대한 강력한 경고입니다.

너는 청지기인데 왜 너의 아들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느냐, 너는 청지기로서의 사명을 다하라는 경고의 말씀이었습니다. 여러분, 어디 자식 문제만 우리가 청지기로서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재산과 건강과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인간관계가 다 하나님의 것이고, 우리는 다 그 일을 위임받아서 살고 있는 청지기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태어날 때 우리는 알몸으로 나오지 않습니까? 세상을 떠날 때도 알몸으로, 빈손으로 떠납니다. 그러면 그 가운데,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살아가는 여정 가운데 우리가 부여받고 살아가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터, 하나님이 허락하신 사람들, 하나님이 허락하신 자녀를 우리가 잘 길러가며 함께 섬기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 청지기로서의 사명이 아니겠습니까? 그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우리 삶의 목적이고 청지기의 의무가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