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냐민의 자루에서 발견된지라

본문: 창세기 44:1-17

축구 경기 중계를 보면 '빌드업(build-up)'이라는 용어를 자주 듣게 됩니다. 불과 십여 년 전만 해도 이 단어는 낯선 것이었습니다. 과거 우리나라 축구는 수비수가 공을 잡으면 저 멀리 공격수에게 무조건 띄워 보내는, 이른바 '뻥 축구'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프로 수준의 경기에서는 수비수가 미드필더에게 공을 연결하고, 미드필더는 상대와 치열하게 싸워 공격수에게 공을 전달하며, 공격수는 자신의 기량으로 골을 넣습니다. 골로 향해 가는 이 모든 과정이 빌드업입니다. 뛰어난 감독이란 상대 팀의 전력, 자기 팀 선수의 역량, 부상이나 퇴장 같은 돌발 상황에 따라 다양한 빌드업 전략을 구사할 수 있는 감독입니다.

빌드업은 축구에만 해당되는 용어가 아닙니다. 우리 일상에서도 얼마든지 적용됩니다. 청춘 남녀가 만나 서로 호감을 느꼈을 때, 한쪽이 더 깊은 관심을 품게 되면 고도의 빌드업 전략이 필요합니다. 선물을 잘 준비하고, 주변 사람들을 통해 호감을 살 수 있는 접근법을 강구해야 합니다. 마음에 든다고 다짜고짜 사랑한다, 결혼하자고 말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전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에는 '예수 천당 불신 지옥'만 외치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 방식으로 마음 문을 여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전도 대상자를 정했으면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그 사람과 깊은 관계를 형성해야 합니다. 충분한 신뢰가 쌓였을 때 비로소 "우리 교회에 한번 가보자, 내가 믿는 예수를 한번 믿어보지 않겠느냐"고 권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요셉과 그의 형제들 이야기에서, 요셉은 형제들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도록 빌드업을 진행하고 있는 중입니다. 요셉이 바라는 것, 그의 유일한 소망은 형제들의 회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정직하게 돌아보는 것, 그것이 회개의 시작입니다. 그러나 지난 이십여 년 동안 형제들은 자신들의 죄를 묻어놓고 살았습니다. 동생을 팔아버린 그 죄를 한 번도 진지하게 꺼내어 직면한 적이 없었습니다. 회개가 일어날 리 만무합니다. 그래서 요셉은 형제들을 하나님 앞에 세우고, 자신을 정직하게 돌아보도록 다양한 방법과 수단을 강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빌드업의 절정에 해당되는 내용입니다.

은잔이 드러낸 절망의 심연

아버지의 허락을 받은 형제들이 막내 베냐민을 데리고, 각종 예물과 갑절의 돈을 가지고 요셉에게 찾아옵니다. 그러나 총리 요셉의 관심은 예물에도, 갑절의 돈에도 있지 않았습니다. 오직 한 사람, 베냐민에게 있었습니다. 불안해하는 형제들에게 요셉은 안심하라 이르고, 억류되어 있던 시므온을 풀어주며, 식탁의 교제를 베풀어 줍니다. 좋은 음식을 마음껏 먹고, 밤이 깊어갑니다. 요셉은 알고 있었습니다. 열두 형제가 한자리에 모여 이렇게 함께 식사하는 것이 생애 처음이라는 사실을. 형제들은 알 턱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도 기쁨으로 벅차올랐습니다. 이제 날이 밝으면 이 모든 긴장이 끝나기 때문입니다.

아침이 됩니다. 길을 떠날 채비를 갖추는 형제들의 발걸음은 가볍기 그지없습니다. 정탐꾼의 누명도 벗었고, 아버지가 그토록 걱정하시던 베냐민도 데리고 안전하게 귀향합니다. 곡식 자루에는 곡식이 가득 차 있어 식구들을 굶길 염려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요셉에게는 아직 끝나지 않은 과제가 있었습니다. 형제들의 회개 문제입니다.

"요셉이 그의 집 청지기에게 명하여 이르되 양식을 각자의 자루에 운반할 수 있을 만큼 채우고 각자의 돈을 그 자루에 넣고 또 내 잔 곧 은잔을 그 청년의 자루 아귀에 넣고 그 양식 값 돈도 함께 넣으라 하매 그가 요셉의 명령대로 하고 아침이 밝을 때에 사람들과 그들의 나귀들을 보내니라" (창 44:1-3)

곡식 자루에 곡식을 한가득 넣고, 돈도 다시 채워 넣는 것까지는 요셉의 사랑이자 호의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베냐민의 자루 아귀에 요셉이 아끼던 은잔을 숨겨 넣었다는 것, 이것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까맣게 모르는 형제들은 날이 밝자 가벼운 발걸음으로 고향을 향해 길을 떠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요셉은 청지기를 보내 그들을 추격하게 합니다. 총리가 아끼던 은잔을 도둑질해 갔으니 잡아오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청지기가 따라가 은잔 도둑 혐의를 제기하자, 형제들은 격분합니다. 우리는 도둑질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때 돈도 다시 가져오지 않았느냐고 억울함을 호소하며 이렇게까지 말합니다.

"당신의 종들 중 누구에게서 발견되든지 그는 죽을 것이요 우리는 내 주의 종들이 되리이다" (창 44:9)

얼마나 억울했으면 이 자리에서 죽겠다고, 모두가 종이 되겠다고까지 말했겠습니까. 그러면 한번 열어보자. 자루를 풉니다. 나이 많은 형부터 시작하여 한 사람 한 사람 자루 안을 조사합니다.

"그들이 각각 급히 자루를 땅에 내려놓고 자루를 각기 푸니 그가 나이 많은 자에게서부터 시작하여 나이 적은 자에게까지 조사하매 그 잔이 베냐민의 자루에서 발견된지라" (창 44:11-12)

열 명의 형제를 뒤질 때까지 은잔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오해한 것이라고 안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막내 베냐민의 자루를 열자 아귀에서 은잔이 반짝이고 있습니다. 그 순간 형제들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절벽 끝에 서 있는데 누군가가 등을 밀어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아득함이 아니었겠습니까.

형제들은 베냐민에게 배신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데려왔는데, 네가 이런 아이였느냐는 원망이 치밀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증거가 나와버렸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당사자 베냐민은 또 얼마나 당혹스러웠겠습니까. 도대체 이것이 왜 자기 자루에 들어와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형제들의 머릿속에는 앞으로 벌어질 일들이 스쳐 지나갑니다. 베냐민은 감옥에 갇힐 것이고, 아무리 울며 탄원해도 총리는 들은 체도 않을 것입니다. 아버지에게 돌아갈 면목이 없습니다. 야곱에게 뭐라고 말해야 합니까. 있을 수도 없고 돌아갈 수도 없는 이 불안감과 복잡함이 그들의 머릿속과 가슴을 가득 채웁니다. 이 복잡한 감정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절망입니다.

절망이 드러내는 사람의 진가

요셉은 왜 형제들을 절망의 깊은 심연으로 밀어 넣는 것입니까. 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분명히 알려면 절망의 시간을 어떻게 이겨내는지를 보면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의 진가도 절망의 시간에 드러나는 법이고, 그 사람의 정체도 절망의 시간에 극명하게 나타나는 법입니다.

요셉은 이미 그것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요셉의 절망은 비교적 일찍 찾아왔습니다. 열일곱 살 소년이었을 때 형제들에 의해 팔려가지 않았습니까. 아버지 심부름을 왔다가 이스마엘(Ishmael) 상인들의 손에 이끌려 이집트(Egypt)로 팔려갑니다. 한순간에 노예가 되어버렸습니다. 아버지에게 작별 인사를 고할 겨를도 없이 비정한 형제들의 손에서 팔렸습니다. 그것이 절망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