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delusions,

No change (2)

In Albuquerque (3:00 am)

조엘 피터 윗킨Joel-Peter Witkin이 16살이 되어 카메라를 손에 넣은 뒤 가장 먼저 떠올렸던 것은(그의 기억이 정확하다면) 6살 때의 일이었다. 그날은 일요일이었으며 어머니의 손을 잡고 형과 함께 교회에 가는 길이었는데 그곳은 늘 참담할 만큼 지루한 곳이었기에 그는 아침마다 옷장 안에 숨거나 방바닥을 굴러다니며 아픈 척을 해보기도 했지만 곧 부질없는 짓임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신의 은총이다, 누군가 너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느냐, 우리는 그 목소리에 응답해야만 한다, 어머니는 침대 밑에 있는 조엘을 끄집어내며 그렇게 말했고 심지어 거실에 기절한 척하고 있는 그를 업고 예배를 보러 가기도 했다. 조엘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체념을 배웠고 이제 될 대로 되라, 하는 마음으로 눈을 감은 채 걸으며 끝나고 집에 가면서 먹을 바닐라 아이스크림의 맛을 생각하고 있었다. 조엘은 종종 눈을 감아버림으로써 현실과 자신을 분리할 수 있었고 눈을 감겠다고 마음먹으면 옆에서 누가 소리를 질러대도 절대 뜨지 않을 수 있었지만 그날은 여자의 날카로운 비명소리에 눈을 떴고 어머니의 손을 놓은 채 비탈길에 멈춰 매캐한 연기 사이로 뒤집어진 자동차를 보았다. 조엘은 너무 오랫동안 어둠을 보고 있어서 눈을 뜨고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발밑으로 굴러온 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했다. 꿈은 언제나 나보다도 살아있어. 그것은 여자아이의 머리였고 그 눈이 자신을 보고 있었기에 무릎을 꿇고 그것을 만져보려 했다. 내 꿈은 왜 항상 흑백일까. 손대지 마 조엘! 어머니가 비명을 질렀지만 조엘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눈을 뜨고 있잖아. 날 보고 있는 거야. 어머니가 재빨리 그 머리로부터 떼어놓았을 때 조엘은 그녀를 마음속 깊이 원망했다. 저는 그 머리를 만져 봤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얼굴을 만져 봤어야 했어요.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 후회가 됩니다. 조엘은 자신이 죽음과 눈을 마주쳤다는 사실을 오랫동안 잊지 못했다. 16살이 되어 사진을 찍기 시작했을 때, 무엇보다 찍고 싶었던 건 바로 죽음의 시선이었다. 그때부터 조엘은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죽음은 삶을 전환시킬 수 있는 하나의 형태이며 인간은 그 전환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저는 죽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다시 한번 재생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저를 어떻게 변형할지 궁금합니다. 조엘은 그렇게 말했다.

브뉘엘도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길을 걷다가 당나귀의 시체를 보았던 기억을 떠올렸다. 무엇에 치인 것인지 당나귀는 처참하게 찢겨있었고 내장은 밖으로 삐져나와 있었으며 엄지손가락만 한 파리들만이 그 위를 날아다니고 있었다. 사라고사Zaragoza에서만 가능한 죽음이군. 그 이미지가, 무엇보다 코를 찌르던 죽음의 냄새가 어린 브뉘엘에게 각인되었다. 그때부터 그는 부패하는 것들을 유심히 바라보게 되었다. 죽음엔 역겨움과 아름다움이 동시에 담겨있다는 걸 비슷한 시기에 깨달았다는 사실이 조엘과 브뉘엘에게 어떤 유대감을 갖게 했는지 어땠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은 꽤 오랜 시간 동안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루이스 브뉘엘이 평생 천착한 주제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계급과 종교, 그리고 욕망 혹은 무의식. 그리고 그 세 가지를 합치면 영화가 되지요. 그는 말했다. 그때까지도 조엘은 앨버커키Albuquerque의 허름한 극장에서 시가를 뻑뻑 피우며 영화를 보던 늙은이가 브뉘엘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자신을 루이스 브뉘엘이라고 소개하며 저는 영화를 만듭니다, 라고 말했을 때도 그가 자기 눈앞에서 커피를 마시며 자신의 사진을 본 적이 있다고 말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영화는 언제나 삶을 배반한다. 스크린에서 좀 떨어져 앉을 걸 그랬나. 우리가 알고 있는 정상의 이미지라는 것은 잘못되었다. 무신론자의 카메라는 언제나 형태 바깥을 본다. 형태만이 언제나 진지해 보여. 내가 셔터를 누를 때마다 전부 꿈으로 변하고 있어. 텍사스 육군의 사진반에 징집되어 자살한 사람들과 폭탄을 맞아 도무지 이것이 인간인지 뭔지 구분할 수도 없을 만큼 훼손된 시체들의 사진을 찍으러 돌아다녔을 때도 조엘은 그런 생각을 했다. 이것은 체험된 일인가. 아니면 내 카메라가 이것들을 비현실로 만드는 것일까. 그것은 공포도 아니었고 환멸도 아니었으며 그 감정이 뭔지 자신도 몰랐기에 그는 카메라를 든 채 날카로운 햇빛 아래 산산 조각난 몸뚱이들을 몇 시간 동안이나 바라보고 있을 수 있었다. 내가 하는 일은 죽음이어야 해. 그게 아니면 아무런 의미가 없을 거야. 누군가가 조엘의 이름을 부를 때까지 그는 언제까지고 거기 서 있었다.

《트리스타나Tristana》가 생각나요. 트리스타나가 꿈에서 종탑에 걸려있는 로페Lope의 머리를 보는 장면 말입니다. 영화의 마지막에도 잘린 로페의 머리를 보여주는 이미지가 반복되죠. 종교가 지배적이었던 시절에는 모든 사람이 종소리를 들으며 생활했습니다. 그 소리를 들으며 참회하기도 하고 지금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깨닫기도 했습니다. 하루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상징이자 좌표였다고 할 수 있죠. 그러나 지금은 달라졌어요. 사람들은 미사의 종소리에 저항하기 시작했고 자신들의 잠을 방해한다고 여겼지요, 영화에 초반부에 종지기가 트리스타나에게 말하죠. 그 대사를 생각하면 잘린 머리의 이미지는 더욱 의미심장하게 느껴집니다. 《트리스타나》를 만들었던 이유는 페르난도 레이Fernando Rey의 잘린 머리와 까뜨린 드뇌브Catherine Deneuve의 잘린 다리를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가능하다면 저는 언제나 신체의 일부분을 잘라내고 싶습니다. 그게 무슨 뜻인가요. 말 그대로입니다. 이 말 뒤에 다른 뜻은 없습니다. 피우시겠습니까? 브뉘엘은 조엘에게 포장도 뜯지 않은 시가 케이스를 내밀며 말했다. 하나면 됩니다, 조엘는 말했지만 브뉘엘은 시가를 박스째 건네주었다.

이제 더 이상 꿈을 해석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아요. 전부 지워지고 있습니다. 처분할 때가 온 것 같아요. 브뉘엘의 개인 창고에는 온갖 종류의 총기들이, 늘 앉아서 시나리오를 쓰던 책상 위에는 여러 종류의 시가가, 서재에는 수천 권의 책들과 함께 커피용품들이 가득했다. 흡연과 사격은 근본적으로 같은 거죠. 그는 그 말을 당장은 이해하지 못했다. 몸의 일부분을 잘라야 한다면 어디를 자르시겠습니까, 갑자기 브뉘엘이 물었다. 글쎄요, 생각해본 적이 없군요. 그는 잠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다가 같은 질문을 브뉘엘에게 던졌다. 저라면 손가락을 자르겠습니다. 그러면 방아쇠를 당길 수 없을 테니까요. 꿈을 계속 꾸는 건 일종의 병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자신의 몸을 잘라내죠. 어떤 의미인지 아시죠? 글쎄 저는 잘 모르겠군요, 그는 모르고 싶었고 시가를 하나 꺼내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저는 이제 카메라를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이걸 피우니 어쩐지 가라앉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군요. 더 필요한가요? 브뉘엘은 그에게 발밑에 있던 낡은 서류 가방을 건넸다. 그는 고개를 저었지만 가방을 받았다. 원하시면 다 가져가시죠. 많이 있으니까. 가방을 받으니 조엘은 그가 곧 사라져버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다른 공간에 존재하기 위해 소음을 사용했지. 이제 어디로 가시나요? 멕시코로 갑니다. 풍경에 묻히기엔 그만한 곳이 없으니까. 조엘은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기에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들은 오랜 친구처럼 웃으며 악수했다. 그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군요. 브뉘엘은 서류 가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가방 안에는 브뉘엘이 아끼던 루거 권총이 들어있었다. 조엘은 어째선지 텍사스 육군 사진반 시절 폭탄으로 오른쪽 무릎 밑이 날아간 동료 병사 에릭 짐머만Eric Zimmerman을(정확히는 그의 미소를) 떠올렸다. Apotemnophilia, 책에서 그것에 대한 내용을 읽은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었지. 몸의 일부가 절단된 상태에 안정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운동 기구에 자신의 다리를 뭉개거나 샷 건, 전기톱, 프레스기, 나무분쇄기, 드라이아이스, 벡스타인 피아노(어떻게?), 언더우드 타자기(??) 등을 이용하여 자신의 신체를 제거했고 에릭의 표정은 신체의 결핍이 자유와 해방을 가져다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에게 가르쳐주었다. 넌 절대 알 수 없을 거야. 이게 어떤 기분인지. 난 비로소 완벽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복무를 마친 후에도 그는 종종 에릭의 소식을 들었고 가끔 통화하기도 했으며 앨버커키에 있는 그의 집에도 한번 가겠다고 약속했지만 그게 진짜 약속이었는지 다른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었으며 갑자기 그는 그동안 자신의 삶이 너무 많은 변명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어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날 저녁 그는 집안을 뒤져 짐머만의 사진을 찾아냈고(그 사진은 이젠 더 이상 읽지 않는 조르주 심농Georges Simenon의 책 사이에 끼워져 있었으며 사진 속의 그는 웃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에릭이 잘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기만 하면 앞으로 자신의 삶도 큰 문제가 없으리라는 예감이 들어 수소문 끝에 그의 연락처를 알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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