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옛날 아라비아 사막에는 무거운 짐을 낙타에 싣고 사막을 횡단하는 대상들이 많았습니다. 그 많은 대상들 중에 탁월한 인물, 사람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는 한 사람이 있었는데 아부하산이라는 분이었습니다. 이분은 참으로 특별한 분이었습니다. 단 한 번도 짐을 싣고 가는 일정에 늦은 적이 없었습니다. 짐을 도둑맞은 적도 없습니다. 사막에서 길을 잃은 적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가 하면, 사막은 모래폭풍이 수시로 불기 때문에 지형이 순식간에 바뀝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을 잃어버리지 않고, 도둑들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도둑맞지 않고, 정해진 시간에 정확하게 물건을 배달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원래부터 이런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던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분은 후천적인 노력을 통해서 이 놀라운 일을 이룬 것입니다. 우선 이 사람은 항상 몸에 별자리 지도를 지니고 다녔습니다. 동서남북을 분간할 수 없을 때 하늘의 별을 보고 지금 내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를 알려주는 별자리 지도가 항상 그의 품 안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늘을 보고 지도를 보고 방향을 잡아갔습니다. 또한 이분은 낙타에 대해서 아주 박식했습니다. 항상 낙타를 본인이 직접 관리했습니다. 낙타가 어느 정도의 물건을 실을 수 있는지 정확히 알았기에 적정한 양의 무게를 싣고 떠났습니다. 낙타의 건강 상태도 세심하게 살폈습니다. 또한 이분은 직접 물과 식량도 챙겼습니다. 비교적 넉넉하게 챙겼습니다.
그런데 무조건 많이 가지고 간다고 좋은 것도 아닙니다. 아주 정확한 양, 그러나 넉넉한 양을 이분은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기억력도 좋았습니다. 사막의 지형지물, 바위는 어디에 있고 언덕은 어디에 있는지도 기억하고 있는 분이었습니다. 이렇게 노력했기 때문에 최고의 자리에서 많은 운송료를 받으며 군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최고의 자리에 오래 있다 보니 본인도 스스로 자기가 최고인 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이 사람이 가슴에 별자리 지도를 가지고 다니지 않습니다. 하늘의 별자리는 매일 보는 것인데 내 머릿속에 다 입력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낙타의 상태도, 물과 식량도 본인이 챙기지 않습니다. 종들에게 시킵니다.
그만큼 했으면 이제 너희들도 알 수 있지 않겠느냐 하며 종들에게 맡깁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사막에 들어갔다가 거대한 모래폭풍을 만납니다. 지형지물이 바뀝니다. 그러나 그는 당황하지 않았습니다. 하늘의 별자리가 내 머릿속에 기억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하늘을 봅니다. 그런데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또한 그의 가슴에 별자리 지도도 없습니다. 동서남북을 분간할 수가 없습니다. 머릿속이 아득해집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며 며칠을 그 자리에 서서 기다리는데 낙타가 픽픽 쓰러지기 시작합니다. 낙타에게 과도한 무게를 실은 것입니다. 건강 상태가 좋지 않은 낙타를 끌고 왔습니다. 이제 물과 식량이 바닥나기 시작합니다. 꼼짝없이 죽게 된 상황입니다.
그런데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상인들 일행에게 발견되어 목숨만 건졌습니다. 그의 명성에 큰 흠집이 났습니다. 과거처럼 그에게 일이 많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매너리즘이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지금 잘하고 있다고 10년 뒤도 잘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과거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해서 오늘도 내일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누가 보장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누구도 보장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하나님 말씀을 보면 예수님 가정 이야기입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님 신앙 교육을 아주 잘했습니다. 철저하게 신앙 안에서 길렀는데,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끔찍한 일이 닥칩니다. 상상할 수 없는 일, 절대로 가정에서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을 경험합니다.
우리는 이 상황을 보면서 과연 하나님 앞에서 깨어 있는지 우리 스스로를 살피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아버지 요셉이 예수님이 나신 지 41일째 되는 날 성전에 올라가서 정결 예식을 지냅니다. 그곳에서 시므온과 안나를 만났습니다. 그곳에서 그분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예언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갈릴리 나사렛에서 삽니다. 그런데 고향살이가 순탄치 않습니다. 배부르지 않은데 길을 떠난 여인, 결혼하기 전에 임신한 여인을 거둔 남자를 보는 고향 사람들의 입방아와 시선이 곱지 않습니다. 그런 와중에서도 아기 예수님은 잘 자랐습니다. 아이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잘 길러가신 덕분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12살 되었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41절과 42절을 보십시오. "그의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예수께서 열두 살 되었을 때에 그들이 이 절기의 관례를 따라 올라갔다가" 유대인들은 1년에 세 번씩 성전에 올라가야 되는 관례가 있습니다. '이 절기의 관례'라 하는 것은 성경의 기록 방식입니다.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이 되면 항상 성전에 올라가서 자신의 모습을 보이고 예물을 드리고 예배드리는 것이 그들의 율법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어릴 때부터 부모님의 손을 잡고 매년 성전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 당시의 일반적인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로마 압제 시절이었기 때문입니다. 본토에 살지 못하고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디아스포라(διασπορά) 유대인들입니다. 그런데 그들 입장에서는 멀리 타국에 사는데 율법대로 1년에 세 번이나 성전에 올라오는 것이 만만치 않습니다.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그런데 또 본토에 사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당시 사람들의 믿음이 좋지 못했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기록되어 있는데 삶은 그 말씀대로 받쳐주지 못했습니다. 멀리 있다고, 혹은 가난하다고, 혹은 나는 바쁘다는 핑계로 유대인의 명절에도 성전에 올라가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정은 달랐습니다. 해마다 절기가 되면 요셉과 마리아는 아들을 앞장세워서 먼 길을 떠납니다.
이들이 살았던 갈릴리 나사렛과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은 거리가 약 150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습니다. 요셉의 직업이 목수였습니다. 가난한 목수입니다. 걸어서 가야 됩니다. 가는 길, 오는 길, 가서 명절을 지키는 시간까지 따지면 족히 한 달은 일을 못합니다. 입에 풀칠할 방법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리가 멀지만, 가난하지만, 하나님 말씀 성경에 이렇게 하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말씀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처음부터 그랬습니다. 이 두 사람이 원래부터 하나님 말씀을 중심으로 사는 분들이었습니다. 누가복음 2장 22절과 24절 말씀을 보십시오.
"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모세의 법대로',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세상의 법대로가 아니라, 자신의 형편대로가 아니라, 자신의 처지대로가 아니라 모세의 율법대로, 주의 말씀에 기록된 대로 행동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안에는 고통이 따릅니다. 피곤하기도 합니다. 물질적 어려움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그런 것 아랑곳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한 가지 질문이 생기지 않습니까?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다들 그렇게 살지 않는데, 다들 여러 가지 핑계로 누구도 그렇게 살고 있지 않은데, 우리가 그렇게 한다고 누가 알아주는가? 나만 이렇게 산다고 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복을 주시고 일확천금이라도 주시는가? 그런 마음이 들지 않습니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이 있습니다. 지금 이들의 아들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굳이 이렇게까지 내 아들을 철저하게 신앙 교육시켜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하나님의 아들인데, 수태고지 받을 때 성령으로 잉태된 아들이라고 했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내가 이렇게 신앙 교육을 열심히 하지 않아도 때가 되면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텐데, 시간이 지나면 하나님이 메시아 정체성을 갖게 하실 것이고, 완벽한 신성과 완벽한 인성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실 텐데 내가 왜 굳이 이런 고생을 하면서 내 아들 신앙 교육을 해야 하는가? 이런 질문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의문을 가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질문 앞에서 거꾸로 한번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조차도 이렇게 부모가 철저하게 신앙 교육을 했는데, 그러면 우리는 내가 낳은 내 자식을 어떻게 훈련하고 신앙 교육하고 있는가? 우리 예수님은 태어날 때부터 완벽한 신성과 인성을 가지고 오신 분입니다. 그런데 부모님이 철저하게 말씀으로 양육했습니다. 우리 자녀들은 어떻습니까? 부모의 기질과 성품을 쏙 빼닮았습니다. 부모가 가진 좋은 성품도 있습니다. 좋은 기질도 있습니다. 좋은 달란트와 재능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악한 것도 있습니다. 이것 좀 닮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내 자녀는 이렇게 살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놀랍게도 나쁜 것은 얼마나 그렇게 잘 닮는지 모릅니다. 다 닮아 있습니다. 그들의 말투와 행동과 눈빛까지도, 하는 모든 것이 어쩌면 저렇게 나의 악한 모습과 똑같이 닮아 있는가 싶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신앙으로 훈련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치지 않고 가만히 내버려 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고, 부모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자녀들이 나이가 들어서 어른이 된다면 어떤 인간이 될 것 같습니까?
내가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을 때 내가 그렇게 고생하고 좌충우돌했던 일들이 내 자녀에게 똑같이 일어난다면 끔찍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부모는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신앙 교육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슨 배짱으로, 무슨 용감함으로 우리 자녀들을 신앙 교육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까? 그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제대로 갈고 닦지 않으면, 그들의 모난 부분을 다듬어 내지 않으면 자녀들이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조차도 이렇게 훈련했다는 이 가정을 보고 오늘 우리가 손 놓고 있는 우리를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 자녀들을 철저하게 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치고 훈련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신명기 법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신명기 율법에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신명기 6장 6절과 7절을 보십시오.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부모가 먼저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부모가 하나님의 말씀을 새기고 많이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했습니다. 앉아 있을 때든지 일어날 때든지 누워 있을 때든지 집에 있을 때든지 길 갈 때든지 가르치라고 했습니다. 부지런히 강론하라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