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이 바로에게 이르되

본문: 창세기 41:17-32

조선 시대 사대부 여성들의 삶은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고단하고 힘들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왕실 여성들의 삶은 드라마가 그려내는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기구한 운명을 산 왕실 여성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로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를 꼽을 수 있습니다. 이 분은 영조 임금의 며느리이자 사도세자의 아내였으며, 정조의 어머니였습니다.

영조 임금은 아들 사도세자를 끔찍이 아끼고 사랑했습니다. 아들이 태어나 첫돌이 지나자마자 세자로 책봉했으니, 최연소 세자 책봉 기록이었습니다. 아들 교육에도 남다른 열의를 보여 직접 교재를 만들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아버지의 뜻대로 자라지 않았습니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학문에 정진하기를 바랐으나, 사도세자는 들판에서 말을 타고 무예를 연마하는 데 마음을 두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깊은 갈등이 생겨갔고, 아버지의 극심한 압박을 견디지 못한 아들은 우울증과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영조는 아들을 뒤주에 가두었고, 일주일 만에 사도세자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 참혹한 광경을 곁에서 지켜본 사람이 바로 사도세자의 아내 혜경궁 홍씨였습니다.

남편이 죽고 난 뒤, 혜경궁 홍씨는 어린 아들 정조를 키우며 지속적으로 한 가지를 가르쳤습니다. "너와 나는 할아버지가 아니면 살 수 없는 목숨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할아버지께 늘 감사해야 한다." 시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이 여인은 자신의 분노를 아들에게 심어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미움과 증오로 세상을 보면 죽일 사람밖에 보이지 않는다. 선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아라."

세월이 흘러 영조가 쫓아냈던 며느리와 손자를 궁으로 불러들였을 때, 혜경궁 홍씨는 "성은을 입어 우리가 살고 있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녀는 큰 결심을 합니다. 남편과 시아버지 사이의 비극이 물리적 거리 때문이라 판단한 것입니다. 창경궁에 거처하던 그녀는 경희궁에 있는 시아버지 영조에게 열한 살 난 아들을 떼어 보내기로 결심했습니다. "할아버지께 가서 할아버지 마음에 쏙 들도록 생활하고 행동하라." 아들을 죽인 아버지, 남편을 죽인 시아버지에게 어린 아들을 보내는 이 결단이 얼마나 처절했겠습니까?

지속적인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았던 어린 정조는 할아버지의 마음에 들었고, 마침내 임금이 됩니다. 왕이 된 후 신하들에게 처음 내뱉은 말은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는 선언이었습니다. 사도세자의 죽음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던 신하들이 그 자리에 있었으니, 피바람이 불 것이라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조는 그들을 포용하여 조선 후기에 새로운 르네상스 시대를 열어갔습니다. 어머니의 가르침대로 미움과 증오가 아니라 선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본 결과였습니다. 1795년, 정조는 어머니의 환갑잔치를 화성에서 열었습니다. 그곳에는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이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린 아들이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의 곁에서 환갑잔치를 연 것입니다. 그 장면이 바로 화성능행도(華城陵幸圖) 그림으로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아들을 잘 키워냈습니다.

사람을 키워내는 일은 그만큼 중요하면서도 그만큼 어렵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 사람을 키워내는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잘 자란 요셉이 등장합니다. 요셉을 키우신 분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원하시고 가장 기뻐하시는 일은 사람을 키워내는 일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이 일에 어떻게 참여할 수 있을지, 어떻게 동역자가 될 수 있을지를 함께 생각하고 결단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열린 마음이 여는 길

요셉의 시간은 술 맡은 관원장의 시간과 달랐습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요셉의 시간과도 달랐고, 바로의 꿈의 시간과도 달랐습니다. 바로가 꿈을 꾸고 요셉에게 말합니다. "네가 꿈을 들으면 해석한다더라." 요셉이 대답합니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실 것입니다." 그는 감옥에서의 2년간의 기다림도 잘 견뎌냈습니다. 믿음이 꺾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처지가 어둡고 답답할지라도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놓지 않았습니다.

이윽고 바로가 자신의 꿈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살진 일곱 마리 암소가 흉한 일곱 마리 암소에게 먹히고, 풍성한 일곱 이삭이 마른 일곱 이삭에게 삼켜지는 꿈이었습니다. 이 꿈을 들은 요셉이 해석합니다.

"요셉이 바로에게 아뢰되 바로의 꿈은 하나라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심이니이다" (창 41:25)

하나님께서 당신이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로는 하나님을 고백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당신이 하실 일을 믿음이 없는 바로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에게나 일정 부분 계시하시고 보여주신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핵심은 하나님의 계시와 음성과 말씀을 수용하는 자세에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민감하고 예민하게 받아들이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줄도 모르고 흘려보내며 지나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의 바로는 하나님께서 자신과 나라를 위해 주신 음성과 말씀을 예민하게 받아들인 인물입니다. 나라를 이끄는 지도자로서 그는 꿈을 꾸었고, 예사롭지 않은 꿈이었습니다. 그는 이 꿈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애굽의 점술가와 현인들을 불렀으나 아무도 해석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의 이야기를 듣고 감옥에 있는 요셉을 불러올렸습니다.

이 장면을 한번 그려보면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림입니다. 애굽의 황제 파라오는 당시 전 세계 제국의 절대 권력자였습니다. 그런 파라오가 히브리 노예 출신의 죄수를 앞에 놓고 그의 해석을 듣고 있습니다. 어지간히 열린 사람이 아니라면, 어지간히 개방적인 사람이 아니라면 이런 장면은 만들어질 수 없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추천한다 하더라도 "헛소리하지 말라. 내가 왜 히브리 노예 출신 죄수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느냐. 다른 사람을 데려오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는 열려 있었습니다. 개방적이었고, 완고한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계시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고,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반대의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속적으로 말씀하시고 끊임없이 섭리하시며 깨닫게 하심에도 불구하고 알아채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모세 시대 애굽의 파라오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찾아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키라고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가서 전했으나 바로는 듣지 않았습니다. 재앙이 애굽 땅에 내렸습니다. 그 재앙을 보고도, 경험하고도 듣지 않았습니다.

"나일 강의 고기가 죽고 그 물에서는 악취가 나니 애굽 사람들이 나일 강 물을 마시지 못하며 애굽 온 땅에는 피가 있으나 애굽 요술사들도 자기들의 요술로 그와 같이 행하므로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여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 (출 7:21-22)

나일 강은 애굽 사람들의 젖줄과 같은 곳입니다. 그들의 수원(水源)이었습니다. 그 강물로 먹고살았고, 농업 용수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나일 강이 피로 변했습니다. 강이 썩어가고 악취가 나니 사람들이 살 수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재앙을 통해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바로는 듣지 않았습니다. 첫 번째 재앙에서 아홉 번째 재앙까지 계속되었으나 듣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열 번째 재앙, 장자의 죽음이 임했습니다. 애굽에 있는 모든 장자가 죽임을 당하고 나서야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냈습니다. 얼마나 미련한 사람입니까?

하나님께서 불신자 바로에게 말씀하셨음에도 듣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꿈으로만 말씀하셔도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열린 마음과 개방적인 태도가 다가올 재앙을 예비하고 대비하는 힘이 됩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깊이 새겨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이 없는 불신자에게까지 이렇게 계시하시고 말씀하신다면, 신앙생활을 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에게는 얼마나 더 말씀하시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전에 나와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 우리에게도 찾아오셔서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신앙 공동체에서 함께 예배드리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전혀 듣지 못하고 흘려보내는 이들이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하나님께서 친히 찾아오셔서 때마다 말씀하고 계십니까? 내가 가진 인생의 문제에 하나님께서 귀 기울여 주시고 선한 손길로 방향을 알려주고 계십니까? 우리는 때로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러나 더 깊이 들여다보면 문제는 우리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