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창세기 40:9-23
조선 시대에는 과거 제도가 있었습니다. 초시에 합격하면 진사가 되지만, 진사는 명예직에 불과하여 먹고살 길이 막막합니다. 대과에 급제해야 비로소 길이 열립니다. 한 선비가 있었습니다. 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으나 대과에 급제하지 못해 늘 없는 살림에 힘겹게 살고 있었습니다. 어려서부터 물려받은 재산이 넉넉하면 모르겠으나 그렇지 못하면, 양반이되 지독하게 가난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세월이 지속되자 집에 부리던 종들도 모두 떠나가고 부부만 남았습니다.
그날도 아침을 굶고 점심도 끼니가 없어 꼼짝 않고 누워 있었습니다. 남편은 이쪽 방에, 부인은 건너방에 있었는데 건너편에서 인기척이 납니다. 먹을 것이 없어 움직일 힘도 없을 터인데, 가만히 귀를 기울이니 화가 나고 서운합니다. '이 사람이 무언가를 감춰두고 혼자 먹고 있구나.' 그래서 "부인, 도대체 지금 뭘 먹는 거요?" 하고 따져 물었습니다. 그런데 부인이 부끄러워하며 대답합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주위를 둘러보니 벽에 붙어 있는 수박씨 하나가 있어서, 그것을 떼다가 지금 씹고 있습니다." 두 사람은 너무 기가 막혀서 끌어안고 한참 동안 울었습니다. 이대로 굶어 죽는 것인가, 양반 체면에 나가서 구걸할 수도 없고, 앞길이 캄캄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오래전에 교분이 있었으나 그다지 친하지도 않았던 친구에게서 기별이 왔습니다. 좋은 관직을 얻었으니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종9품 벼슬이라 가장 말단의 직급이었지만, 엄연한 국가 공무원이요, 먹고살 길이 열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부터 그 집안은 일어서기 시작합니다. 부지런히 일했고, 주경야독하며 타고난 성실과 열심으로 정부 요직을 두루 거칩니다.
세월이 한참 지났습니다. 어느 날 부인이 묻습니다. "여보, 오래전에 우리가 수박씨 씹어 먹고 있던 그날을 기억하십니까? 그때 당신의 오랜 친구가 우리를 건져 주어서 이렇게 살게 되었는데, 혹시 지금 그 친구는 어떻게 지내고 있습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듭니다. '잊고 있었구나. 내 친구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살펴보니 집안이 몰락하여 사정이 말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부인이 말했습니다. "나랏일에 지장을 주는 것이 아니라면,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분을 돌봐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크게 뉘우치고 강원도 간성 마을의 사또로 그 친구를 천거해 주었습니다. 은혜를 갚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결초보은(結草報恩)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솔직히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의 현실은 결초보은보다 배은망덕이 훨씬 더 흔한 세상입니다. 보은과 배은, 망덕 사이의 어디인가를 우리는 지나가고 있지 않습니까? 부모 자식, 형제자매 간에도 재산 때문에 서로 싸우고 소송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학교에서 선생님과 제자의 정은 사라진 지 오래이고, 이웃끼리 아껴주고 나눠 먹던 시절은 수십 년 전 이야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결초보은은 이제 옛 고사에서나 만날 수 있는 먼 이야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배은망덕한 사람이 한 명 등장합니다. 기억하겠다고 약속하고, 은혜를 갚겠다고 해놓고서는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의 배은망덕도, 이 사람의 망각도 사용하셨습니다. 내가 베푼 은혜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 때문에 속상하고 가슴 아파했던 경험이 우리에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이 마냥 속상하고 힘든 일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이 말씀을 통해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보디발은 요셉에게 두 사람을 부탁했습니다. 왕의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이었습니다. 요셉은 이들의 옥중 생활이 불편하지 않도록 성실하게 보살폈습니다. 어느 날 이들의 얼굴을 보니 근심의 빛이 역력합니다. 그래서 물어보았습니다. "어찌하여 오늘 당신들의 얼굴에 근심의 빛이 있나이까?" 그들은 어젯밤 꿈을 꾸었는데 도무지 해석이 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두 사람은 꿈 해석을 원했지만, 사실 꿈만 해석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인생 자체가 해석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거울에 비추어 보지 않으면 우리의 인생이 어떻게 해석되겠습니까? 하나님 없이 사는 인생에게 자기 삶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와 같습니다.
요셉이 말합니다.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하건대 내게 이르소서." 요셉의 자신감 있는 모습을 보고 두 사람이 자기 꿈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먼저 술 맡은 관원장이 말합니다. "내 앞에 포도나무가 있는데 가지가 셋이 뻗어 있고, 거기에 싹이 나고 꽃이 피고 포도송이가 익었습니다. 내가 이 포도를 따서 즙을 짜 바로의 잔에 넣어 왕께 드렸습니다." 요셉이 이 꿈을 해석합니다. 세 개의 가지는 사흘을 의미하며, 사흘 안에 바로가 전직을 회복시켜 줄 것이라 했습니다.
곁에서 듣고 있던 떡 굽는 관원장이 이 해석을 들으니 마음에 기대가 생겼습니다. 자기가 꾼 꿈도 요셉에게 알려줍니다. "나는 꿈에 흰 떡이 담긴 세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있었는데, 맨 윗광주리에는 바로에게 진상할 각종 구운 음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새들이 와서 그것을 먹어버렸습니다." 요셉이 해석합니다. 광주리 셋은 역시 사흘을 의미하며, 새들이 먹어버렸으므로 사흘 안에 나무에 매달리게 될 것이요, 새들이 살을 뜯어 먹을 것이라 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의아함을 느낍니다. 어떻게 요셉이 이런 충격적인 이야기를 가감 없이 그대로 전할 수 있었을까, 차마 말하기 어려웠을 터인데 어떻게 이 해석을 있는 그대로 전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그러나 이것은 요셉이 하나님께 받은 말씀이었습니다. 요셉이 분명히 선언하지 않았습니까?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하나님께 해석을 받아서 전하는 것이기에, 있는 그대로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약 하나님과 상관없이 요셉이 이들을 위로하려 했다면 이처럼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괜찮을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회복될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아 전하기에 있는 그대로 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본질은 있는 그대로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그대로 우리에게 주어질 때, 받는 사람은 일차적으로 마음에 충격을 받게 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충격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찔러 쪼갠다고 했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하나님 말씀이 우리에게 날것으로 주어지면, 거짓과 위선 가운데 사는 우리 마음속에 들어와 그 말씀은 우리를 쪼개는 말씀이 됩니다. 말씀을 듣고 충격받지 않으면, 말씀을 듣고 '내가 지금까지 잘못 살았구나' 하며 돌이키지 않으면, 그 말씀은 살아 있는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에는 우리를 위로하는 말씀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죄 가운데 사는 사람을 돌이키게 하는 회개의 선포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말씀이 정직하게 우리에게 주어지면, 그 말씀은 잘못 살고 있는 우리를 향한 책망의 말씀으로 우선 주어지는 것입니다.
선지자들 가운데 참 선지자도 있고 거짓 선지자도 있었습니다. 예레미야가 예언했던 남유다 말기, 거짓 선지자들이 넘쳐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주신 말씀은 "남유다가 이렇게 하다가는 바벨론에 의해서 철저하게 짓밟히고 망할 것이니, 이것을 가서 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전하는 선지자가 인기가 있겠습니까? 반면에 거짓 선지자들은 "평안하다, 걱정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보호하실 것이다, 우리에게는 성전이 있지 않느냐, 성전으로 피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하고 거짓 예언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멸망과 파멸을 선포하는 예레미야를 미워했습니다. 때리기도 하고, 가두기도 하고, 진흙 구덩이에 빠뜨리기도 했습니다.
"다시는 이런 말씀을 전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결심해도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이 불타는 심정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렘 20:8-9)
답답해서 견딜 수 없어 또 선포합니다. 파멸과 멸망을 선포합니다. 듣기 좋은 소리만 하는 것이 복음이 아닙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천국이 있고, 지옥이 있습니다. 강단에서는 천국도 선포하고 지옥도 선포해야 합니다. 성경에는 예수 믿어서 병 고침 받고 형통하게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나오지만, 예수 믿다가 매맞고 감옥에 가고 순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