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은 하나님께

본문: 창세기 40:7-8

우리가 외국어로 된 책을 읽거나 번역할 때에는 면밀하게 살펴서 해석해야 합니다. 우리 글과 어순이 다르고 단어의 뉘앙스가 다르기 때문에 조금만 부주의하면 오역하기 쉽습니다. 해석에는 섬세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통계 자료를 분석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통계 자료를 결과만 받아보면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열 명의 학생이 수학 시험을 보았는데 아홉 명이 100점을 받고 한 명이 0점을 받았다면, 평균은 90점입니다. 이 학생 집단을 평균 90점의 집단이라 평가하면 학력 수준이 높은 집단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90점을 기준으로 학생들을 지도하면 0점을 받은 학생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습니다. 이것이 평균이 가지고 있는 함정입니다. 원 데이터를 살펴봐야 정확한 학습 지도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접하는 광고도 해석을 잘못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탈모 관련 식품 광고에 "이 식품을 꾸준히 먹으면 20퍼센트 정도의 효과가 있습니다"라고 쓰여 있다고 합시다. 탈모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들은 이 식품을 꾸준히 먹어서 효과를 보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기준과 정의가 빠져 있습니다. 얼마나 꾸준히 먹어야 하는지, 3개월이면 되는지, 1년을 먹어야 하는지, 10년을 먹어야 하는지 기준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어떤 상태의 사람에게 효과가 있는지도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탈모가 막 시작된 사람에게 효과가 있는지, 머리숱이 거의 없는 사람에게도 효과가 있는지 기준이 전혀 없습니다. 속기 딱 좋은 구조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상식이라고 믿고 있는 것도 해석이 잘못되어 상식이 아닐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물 위에 떠 있는 백조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물 위에 떠 있는 우아한 백조를 자기 계발의 예화로 많이 들었습니다. 백조가 물 위에 우아하게 떠 있으려면 물 아래에서 발을 쉴 새 없이 움직여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잘 살려면, 무언가를 유지하며 살려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열심히 수고하고 노력해야 한다는 교훈으로 사용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백조를 전혀 모르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백조의 깃털 자체가 기름 막으로 덮여 있어 물에 잘 젖지 않습니다. 백조 같은 조류는 가슴과 배에 공기주머니, 즉 기낭(氣囊)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뼈 안에 공기가 들어 있는 함기골(含氣骨)이라는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굳이 발을 움직이지 않아도 가만히 있어도 물 위에 우아하게 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오해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요? 1960년대 우리나라에 소개된 일본 만화를 보고 그대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살펴보지도 않고, 검증하지도 않고, 수십 년째 이것을 진실이라고 믿어 왔습니다.

우리 주변에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겠습니까? 해석이 잘못되어서 일어나는 문제들, 그런데 그런 문제들이라고 해봐야 기껏해야 백조 문제이고 건강식품 문제이고 평균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문제는 내 인생에 대한 해석 문제입니다. 우리 인생, 평생을 살다 보면 수많은 일을 겪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에 대해서 해석을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내 인생의 문제를 우리는 어떤 식으로 해석합니까? 사람들은 해석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좋은 일이 일어나면 운이 좋았다고 표현하고, 예기치 않은 나쁜 일이 일어나면 운이 나빴다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절실하게 알고 싶으면 점쟁이를 찾아갑니다.

그런데 우리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관점으로 내 인생을 해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 인생이 진정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요셉의 입을 통해서 "해석은 하나님께 있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 인생, 남들이 볼 때 답이 없는 인생, 해석하기 어려운 난해한 인생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풀리지 않을 문제가 없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내 인생을 어떻게 풀어가야 하고 해석해야 할지를 함께 묵상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고난이 빚어낸 성장

요셉의 인생은 고난을 통해서 성장합니다. 그가 헤브론에서 아버지 집에 열일곱 살 소년으로 있었을 때, 그는 상대방을 살필 여유가 없었습니다. 살필 생각도 없었습니다. 자기가 꾸었던 두 번의 꿈을 형제들 앞에서 가감 없이 쏟아놓습니다. 형제들의 얼굴이 어떻게 변하는지, 표정이 바뀌는지, 불쾌해하는지, 이런 것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가 어린 열일곱 살짜리 소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고난을 받습니다. 애굽 노예로 팔려 왔습니다.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제는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의 얼굴에 근심의 빛이 있는 것을 읽어냅니다. 읽으려고 노력해서 읽어진 것이 아닙니다. 자연스러워진 것입니다. 고난을 겪다 보니, 다른 사람의 아픔을 살피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그가 깊어지고 성장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방식으로 요셉을 다루시고, 훈련시키시고, 성장시켜 주셨습니다.

이제 이 두 사람의 얼굴에 근심의 빛을 본 요셉이 입을 열어 직접 질문합니다.

"요셉이 그 주인의 집에 자기와 함께 갇힌 바로의 신하들에게 묻되 어찌하여 오늘 당신들의 얼굴에 근심의 빛이 있나이까" (창 40:7)

이 장면을 보면 요셉의 지경이 넓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헤브론 시골 구석에 있었다면 이런 부류의 사람들과 만나서 대화할 수 있었겠습니까? 왕의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은 애굽 고위 공직자들이며, 파라오(Pharaoh)의 최측근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고난을 주셔서 애굽으로 옮겨놓으셨기에, 그는 파라오 친위대의 대장 보디발을 만났습니다. 보디발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웠을 것입니다. 경험할 수 없었던 것을 경험합니다. 보디발의 아내와 같은 사람을 만나 인생의 큰 유혹도 겪어봅니다. 간수장을 만나고, 감옥에 들어와서 섬기는 수많은 사람들을 통해 인생을 배우고, 삶의 덧없음과 깊이를 배웁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과 함께 대화까지 나누고 있습니다.

인생의 성장이라는 것은 고난을 통해서 깊어지기도 하고 폭이 넓어지기도 합니다. 요셉은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경험을 쌓아갔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그를 다루시고 훈련시키셨습니다.

이제 이 두 사람에게 요셉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어찌하여 얼굴에 근심의 빛이 있습니까?" 이 사람들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하건대 내게 이르소서" (창 40:8)

이 두 사람이 꿈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난밤에 각각 이상한 꿈을 꾸었는데 꿈자리가 뒤숭숭하다, 그런데 이 꿈을 해석할 방법이 없다고 대답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꿈 이야기를 했지만, 조금 더 폭넓게 보면 이 두 사람이 자기 인생을 해석할 방법이 없다는 뜻입니다. 바로 며칠 전만 하더라도 이 두 사람은 왕의 최측근 신하들이었습니다. 최고의 권력을 누리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 순간 낭떠러지로 떨어집니다. 감옥에 들어왔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끌려나가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수도 있고, 다시 그 옛날 그 자리로 복권될 수도 있습니다. 자기 인생을 도무지 해석할 방법이 없습니다. 왜 이런 일이 자신에게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답답한 자기 이야기를 히브리 노예인 요셉에게 털어놓고 있습니다.

어찌 이 두 사람뿐이겠습니까? 역사상 수많은 사람들, 우리가 아는 위인들, 그들도 자기 인생을 해석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역사상 수많은 군주들 가운데 광대한 영토를 차지했던 사람 중 최고라 할 수 있는 인물이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마케도니아(Macedonia)의 필리포스 2세(Philip II)였습니다. 아버지의 소원이 있었습니다. 저 바다 건너 페르시아(Persia)와 한번 전쟁하여 저 땅을 차지해 보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케도니아 같은 작은 나라가 대제국 페르시아와 겨루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스무 살에 왕이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소원을 이루어줍니다. 전쟁을 했습니다. 페르시아를 정복합니다. 정복 군주가 됩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남쪽으로 내려가서 애굽까지 차지합니다. 더 동쪽으로 가서 인도까지 차지해 버렸습니다. 대단한 정복자였습니다. 싸움만 잘한 것이 아닙니다. 전쟁에만 능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알렉산더의 스승이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아닙니까? 어려서부터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철학을 배웠습니다. 역사를 배웠습니다. 문학을 배웠습니다. 자연과 세상의 이치를 배웠습니다. 그는 문학에도 능했고 문화적인 것에 탁월한 천재였습니다. 그가 정복한 도시에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알렉산더의 도시'라는 뜻입니다. 도서관을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책을 읽게 했습니다. 정복당한 나라의 백성들이 알렉산더 대왕을 칭송합니다. 완벽에 가까운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Orient) 문화를 결합해서 헬레니즘(Hellenism) 문화를 만들어냈습니다. 위대한 군주입니다.

그랬던 그가 아라비아(Arabia) 원정을 앞두고 말라리아(malaria)를 옮기는 모기에 물려서 12일 동안 의식불명 상태에 있다가 세상을 떠납니다. 그때 나이가 서른둘이었습니다. 자기 인생을 해석하지 못해서 일어난 일입니다. 영원토록 자기가 온 세상을 차지할 줄 알았습니다. 전쟁에 나가기만 하면 이기고, 한 번도 진 적이 없었으니까요. 그러나 한 치 앞을 몰랐던, 해석 불가한 인생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