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유익할까?

본문: 창세기 37:25-36

어릴 때 학교에서 배운 도덕이라는 과목은 공동체성을 형성하고 사회성을 길러주는 데 유용한 과목이었습니다. 도덕 시험 문제는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다음 중 길을 건너는 올바른 방법이 아닌 것은?' 1번 육교를 건넌다, 2번 횡단보도를 건넌다, 3번 무단횡단을 한다. 인지력이 있고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답을 찾을 수 있는 문제입니다. 할머니가 무거운 짐을 이고 걸어가고 있으면 도와줘야 하는가, 아니면 그냥 지나쳐야 하는가와 같은 문제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도덕교육을 받으면 삶의 기준이 생기고 방향이 생깁니다. 어떤 식으로 인생을 살아가야 할지, 사회라는 공동체에서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어느 방향을 가지고 달려가야 할지를 마땅히 알게 됩니다.

그런데 요즘은 꼭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습니다. 신문이나 뉴스를 통해 도덕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는 것 같은 사람들의 행태가 보도되기 때문입니다. 지하주차장에 주차할 때 주차 라인 하나만 사용해야 하는데, 어느 한 차가 주차 라인을 물고 두 공간을 전부 차지합니다. 입주자들이 항의하면 그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차가 외제차라서 넓은 공간이 필요하니 두 곳을 꼭 사용해야 한다"고. 죄책감도 없고 미안함도 없고 염치도 없으며, 남들에게 폐를 끼친다는 생각조차 없습니다. 지하철이나 버스, 공공시설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모르고, 남들에게 폐를 끼치는지도 모른 채 행동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요? 18세기 독일의 철학자 칸트(Immanuel Kant)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 의지의 준칙이 보편적 입법의 원리에 타당하도록 행동하라." 우리가 행동하는 모든 기준은 보편적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보편성의 기준을 어디에 둘 것이냐 하는 질문에 칸트는 그 기준이 도덕이요, 법이라고 답했습니다.

그런데 도덕이 무너지고 법이 무너진 사회라면 어떻습니까? 요즘 사람들은 자기 행동의 기준을 자기 좋은 것에 둡니다. 내가 기분 좋으면 그만이고, 내가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 버립니다. 그래서 기준도 도덕도 법도 무너진 사회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런 사회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까요?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도덕이나 법보다 우선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 아닙니까? 도덕이나 법보다 훨씬 강력하고, 믿음의 사람들이 절대 기준으로 붙잡고 살아가야 하는 것,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의 말이 등장합니다. 유다가 묻습니다. "무엇이 유익할까?"

실리의 유혹, 말씀의 기준

형제인 요셉을 죽여서 없애버리는 것과 팔아서 돈을 얻는 것 중에 과연 무엇이 유익한가? 미디안 상인들의 입장에서는 인신매매 현장에서 이 사람을 사서 팔아넘기는 것과 이 범죄 현장을 고발하는 것 중에 무엇이 유익한가? 오늘 이들의 삶과 선택을 통해 우리가 어떤 유익을 쫓아 살고 있는지, 유익의 기준을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요셉의 형제들, 야곱의 아들들은 요셉을 죽이기로 결정하고 구체적인 계획까지 세웠습니다. 그런데 르우벤은 이 아이를 살려서 아버지에게 돌려보내 주려 했습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구덩이에 아이를 넣어 둡니다. 그렇다면 르우벤이 그 곁을 지켜야 마땅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떤 일인지 자리를 이탈하고 말았습니다. 르우벤이 자리를 비운 사이, 멀리서 장사꾼들이 향품을 싣고, 유향과 몰약을 싣고 애굽으로 내려가는 일단의 무리가 다가옵니다. 유다가 그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앉아 음식을 먹다가 눈을 들어 본즉 한 무리의 이스마엘 사람들이 길르앗에서 오는데 그 낙타들에 향품과 유향과 몰약을 싣고 애굽으로 내려가는지라" (창 37:25)

향품과 유향과 몰약, 모두 값비싼 물건들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애굽에 팔기 위해 내려가는 중입니다. 이 상인들이 거래하는 애굽 사람들은 적어도 나라의 고관들이요, 돈이 많은 사람들이요, 이 물건을 구매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유다가 이들을 보고 형제들에게 제안합니다.

"유다가 자기 형제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덮어둔들 무엇이 유익할까 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고 그에게 우리 손을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혈육이니라 하매 그의 형제들이 청종하였더라" (창 37:26-27)

유다의 형제들이 유다의 제안을 청종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이 '청종'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듣고 따르며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다의 형제들은 유다의 말을 옳다고 여기고, 마치 하나님의 말씀처럼 따랐습니다. 전적으로 동의한 것입니다.

유다가 이렇게 말한 까닭이 있습니다. 요셉을 죽여서 피를 흘리는 것과 팔아서 돈을 취하는 것 중에 무엇이 유익하겠는가? 유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지금이야말로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기회였습니다. 아버지 야곱은 첫째 아들 르우벤을 장남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르우벤은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여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힌 자였고, 그 일로 장남의 자리를 잃게 됩니다. 아버지가 그를 신임하지 않았습니다. 둘째 아들 시므온과 셋째 아들 레위는 어떻습니까? 그들은 세겜 사람들을 살육했습니다. 할례 언약으로 조약을 맺고 삼 일째 되던 날 쳐들어가서 칼로 죽여 버렸습니다. 그 일 때문에 가정에 위기가 찾아왔고, 세겜에 더 이상 살 수 없어서 그곳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야곱은 둘째 아들과 셋째 아들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장자권은 요셉에게 있었습니다. 요셉만 없어지면, 논리적으로 순서상 유다가 그 다음 장자권을 가져갈 자격이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법에 의하면 장자에게는 아버지 재산의 절반이 돌아갑니다. 그래서 유다는 적극적으로 행동한 것입니다. 요셉만 없어지면 이 장자권이 자신에게 올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베냐민은 아직 어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직접 손에 피를 묻히는 것에는 마음의 거리낌이 있었습니다. 손에 피를 묻히고 그를 없애버릴 수는 있지만, 평생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형제들에게 차라리 팔아치우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고 제안한 것입니다.

형제들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요셉이 눈엣가시였습니다. 맨날 꿈을 꾸고, 채색 옷을 입고 자기들을 감시합니다. 쳐다보기도 싫고 없애버리고 싶은데, 죽이려니 마음에 가책이 됩니다. 그런데 돈까지 생긴다니 일석이조였습니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동의한 것입니다. 이들의 가치는 실리주의였습니다. 죽이는 것보다 팔아치우는 것이 실리적이라는 판단, 실용성의 관점으로 접근한 것입니다.

훗날 예수님의 제자 중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버린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가룟유다는 처음부터 예수님을 영혼의 메시아로 믿고 따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정치적 해방자로 생각했습니다. 삼 년을 충성을 다해 열심히 따라다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정치적 해방자의 모습을 보여 주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정치적 해방자로 우리를 건져 주실 것이라는 마지막 희망까지 사라졌습니다.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 지고 죽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유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본전 생각이 납니다. 젊은 청춘 삼 년을 다 바쳤는데, 어차피 가만히 두어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이라면, 차라리 넘겨서 은 삼십이라도 얻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 마음속에는 실리주의가 꿈틀거리고, 실용성이 움직이며, 계산이 돌아갑니다.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한지라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마 26:48-49)

이토록 비열한 입맞춤으로 예수님을 넘기고, 은 삼십을 얻어 자신의 삼 년을 보상받습니다. 가룟유다나 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나, 이 부분에서 놀랍도록 닮아 있습니다. 이들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실용성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 '실용적'이라는 말이 어떤 의미로 들립니까? 누군가에게 "당신은 참 실리적인 사람입니다, 당신은 참 실용적입니다"라고 말하면, 그것은 칭찬입니다. "당신은 참 지혜롭습니다"라는 말과 통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신앙생활에 적용해 보면 어떨까요? 하나님의 교회가 이치에 밝고 손해 보려 하지 않으며, 한 푼도 손해 보지 않고 모든 것에서 이익을 취하려 한다면, 우리는 그 교회를 정상적인 교회라고 보겠습니까? 믿음 생활이 어떻게 실리만 따지며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실용적인 가치가 하나님 나라의 제일 가치입니까? 그렇지 않을 때가 너무 많지 않습니까?

하루는 어느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나와서 영생에 대해 질문합니다. "주여, 영생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묻습니다. "네가 율법은 다 지키느냐?" "그렇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율법을 열심히 지켰습니다." "그렇다면 네가 있는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 이 사람은 부자입니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면 남는 것이 없습니다. 이 사람은 유대인의 관원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면 관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 사람은 젊은 청년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면 청춘도 포기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비실용적이지 않습니까? 실용성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의 말씀을 수용할 수가 없습니다. 이 청년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수용할 수 있겠습니까? 수지타산이 맞지 않습니다. 영생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고, 죽어 봐야 아는 것인데, 눈에 보이지 않는 영생을 얻기 위해 눈에 보이는 가장 확실한 물질과 권력과 젊음을 바치는 것은 계산이 맞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근심하며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