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교회가 이달의 책으로 함께 읽고 있는 책이 『이어령 80년 생각』이라는 책입니다. 그 책에 보면 이어령 선생의 창조적인 아이디어와 창조성이 아주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중에 단연 압권은 1988년 서울올림픽입니다. 그분은 서울올림픽 개회식과 폐막식의 전체를 총괄하고 기획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보통 다른 나라에서 올림픽 개막식이라고 하면 그 나라가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 최상의 것을 보여주려고 합니다. 전체적이고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통해서 세계인들에게 그 나라가 가지고 있는 위엄과 위상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이어령 선생은 달랐습니다. 그는 침묵과 여백을 선택했습니다. 광활하고 넓은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에 굴렁쇠를 굴리는 한 어린 소년을 등장시켰습니다. 그 소년이 화면에 등장하고 약 1분 동안 올림픽 주경기장을 굴렁쇠를 굴리면서 뛰어다녔습니다. 전 세계인들이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하고 1분 동안 숨죽이고 이 어린아이가 뛰어다니는 장면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장면에서 세계인들은 큰 감동을 느끼고 신선함을 느꼈습니다. 어떤 다른 올림픽 개회식에서도 볼 수 없는 장면이고 역동적인 내용이었기 때문입니다.
올림픽이 끝나고 나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어령 선생에게 질문합니다. 어떻게 이런 기획과 생각을 하게 되었느냐고. 이때 그는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깊은 답변을 합니다. 1970년대 초에 그분이 프랑스를 방문했는데 그때가 성탄 즈음이었습니다. 동네 어귀마다 성탄절 포스터가 붙어 있는데 포스터에 주제가 "이들에게는 노엘이 없다"라는 주제였습니다. 1950년대 우리나라 한국전쟁이 끝나고 고아들의 참상이 그 포스터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전쟁고아가 얼마나 비참합니까? 프랑스뿐만 아니라 전 유럽, 전 세계인들이 대한민국을 기억하는 이미지가 바로 전쟁과 가난이었습니다. 1970년대 이어령 선생이 프랑스를 방문했을 당시에는 전쟁이 끝나고 2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세계인의 머리 속에는 한국이란 가난한 나라, 전쟁고아가 넘쳐나는 나라로 각인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이 각인을 깨고 싶었습니다. 1981년 9월 30일, 이날은 사마란치 IOC 위원장이 "서울!"이라고 외친 날입니다. 그날 태어난 아이들을 수소문했습니다. 그중에서 건강하고 밝게 잘 자란 아이, 1988년 당시 8살이 된 윤태웅 어린이를 발굴했습니다. 이어령 선생이 당시 8살 난 윤태웅 군을 안고 있습니다. 이 어린아이에게 굴렁쇠를 굴리는 연습을 시켜서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에 내세운 것입니다.
희망의 생명만큼 더 강렬한 것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말기암 환자들이 자신의 집에 화초를 키우고 꽃을 키웁니다. 꽃이 생명처럼 피어나는 것을 보면서 자신도 희망의 끝자락을 붙잡습니다. 전쟁 통에 있는 사람들이 그 통에도 태어난 아이를 보면서 이 다음 세대는 더 이상 전쟁이 없고 행복한 아이의 해맑은 웃음을 보며 그들은 또한 희망을 가집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을 꿈꾸고 희망을 붙잡고 살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하나님의 말씀에도 아주 절망적인 상황인데 그럼에도 희망이 있습니다. 에덴에서 쫓겨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온갖 나무 중에 낙원인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가 쫓겨납니다. 얼마나 절망적입니까? 더 이상 에덴을 경험할 수 없고 이렇게 아름다운 공간에서 쫓겨난다는 것, 절망과 낙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도 여전히 희망이 존재합니다. 그 희망은 사람이 만든 희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셨고 사람이 붙잡은 희망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 인생이 아무리 절망적이고 괴로울지라도 그 안에서 희망을 붙잡고 새 소망을 가지고 일어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20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라." 원래는 여자라 했습니다. 남자는 이쉬(אִישׁ), 여자는 이솨(אִשָּׁה)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에덴에서 쫓겨나는 그때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고 불렀습니다. 왜 하필 이때였을까요? 이름을 지으려면 각종 동물과 식물의 이름을 지을 때 그때 이름을 짓든지, 그렇지 않으면 조금 더 편안한 곳에서 이름을 짓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에서 내쫓으시는 바로 그때 그들은 여자의 이름을 하와라고 바꾸어 불렀습니다.
하와(חַוָּה)라는 이름의 뜻은 생명입니다. 성경은 그 생명을 해석하기를 모든 산 자의 어머니라고 불렀습니다. 명사입니다. 생명, 생명의 유업을 이어받을 자라는 뜻이고, 이 말은 동사 하바(חָוָה)에서 왔는데 "생명을 이어가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심판의 자리에서 이들에게 한 가지 힌트를 주셨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그 놀랍고 무서운 심판을 경험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완전히 버리지는 않으셨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습니까? 그걸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될 줄 알고 아담과 하와는 힘을 합쳐서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이제는 죽었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시고 책망하시는 그 말씀을 들으면서 그들은 한 가지 소망과 희망을 가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뱀을 심판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여자를 심판하실 때 하나님은 여자에게 임신과 출산의 고통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생명의 유업을 이어가는 것을 완전히 막지는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그들에게 준 희망의 자락이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붙잡았습니다. 그렇구나,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희망이고, 희망은 이제 우리의 사명이로구나. 비록 지금 우리가 아름다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지만 에덴에서 나가서 우리가 해야 될 일은 바로 생명을 이어가는 일이로구나. 생명을 이어서 우리의 후손이, 여자의 후손이 악한 사탄의 머리를 밟아서 그들을 이기고, 우리는 실패했지만 더 이상은 실패가 없도록, 더 이상은 사탄에게 노예가 되지 않도록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야 되는구나. 그들은 그것을 사명으로 붙잡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결단했습니다. 그 결단의 증표와 의미로 여자의 이름을 하와, 모든 산 자의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지어준 것입니다. 이제부터 그들은 에덴에서 쫓겨나면 자녀를 낳는 일에 힘을 쓸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것은 모든 산 자의 어머니라는 뜻은 생물학적인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의미가 이 속에 잘 내포되어 있습니다. 자녀를 낳았다고 끝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 자녀를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믿음 안에서 잘 길러가야 됩니다. 비록 우리는 에덴에서 실패했지만 우리가 낳을 자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고, 여자의 후손이 되어서 뱀 곧 사탄의 권세를 이기는 자로 우리가 길러내겠다. 영적인 산 자의 어머니가 되고 영적으로 산 자의 아버지가 되겠다. 이 결단을 아담과 하와가 이 자리에서 한 것입니다.
오늘 이 결단은 우리에게도 중요한 의미를 가져다 줍니다. 교회의 존재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교회가 여기에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른 여타의 어떤 이유를 가지고 온다 하더라도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는 영혼 구원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될 수가 없습니다. 교회가 구제 사역을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구제 사역의 마지막 종착 목적은 영혼 구원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들은 세상의 빛이다, 세상의 소금이다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야 되는 이유도 결국은 영혼 구원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도하는 그 영혼 구원을 위하여 우리가 이 자리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하신 말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우린 그걸 붙잡고 살아갑니다.
성경 곳곳에서 하나님의 뜻이 나타납니다. 디모데전서 2장 4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의 뜻입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너희가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되라, 너희가 모든 산 자의 아버지가 되라,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 목적을 위해서 얼마만큼 준비되어 있습니까? 우린 그 목적을 위해서 얼마만큼 성실하게 노력하고 달려 왔습니까? 신앙생활을 수십 년 동안 했는데, 오랫동안 교회를 섬기고, 오랫동안 교회 공동체에 몸담고 있었는데, 내 입술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수 없다면, 그렇게 준비되어 있지 않는다면, 어떤 사람이 나에게 다가와서 "예수님이 누굽니까? 나에게 예수님을 좀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할 때 덜컥 겁이 난다면, 그런 건 목사님들만 하는 일이고 교회에서 특별한 은사를 가진 사람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우리가 신앙생활 잘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를 통해서 그 뜻이 이루어져야 됩니다. 발을 통해서 말씀을 공부하고 말씀을 지키고, 누구를 만나든지 진리의 말씀을 증거할 수 있는 영적인 실력을 갖춰야 됩니다.
신앙생활 하는 이유가 장로 되고 권사 되고 교회에서 존경받고 인정받기 위해서 신앙생활 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훗날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갔을 때 천국에 가서 하나님께서 "너는 무엇 하다가 왔느냐?"라고 물으신다면, 우물쭈물 말도 하지 못하고 있다면, "나의 뜻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는 것이 내 뜻인데 너는 과연 누구에게 얼마만큼 진리를 증거했느냐? 교회 안에도 여전히 구원받아야 될 사람이 넘쳐나고, 세상에는 말할 것 없이 구원받아야 될 사람이 넘쳐나는데, 너는 너의 입술로 얼마나 복음을 전하다 왔느냐?"고 물으신다면 우리는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초대교회에는 일곱 집사님들이 계셨습니다. 일곱 집사님을 초대교회가 세운 목적은 분명했습니다. 재정 출납입니다. 구제 사역입니다. 사도들이 재정을 출납하고 구제하는 것이 힘이 부쳤기 때문에 집사님들 세워서 구제하고 재정을 출납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은 그 일에만 특화된 분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분들의 공통 분모는 모두가 다 말씀을 증거하는 탁월한 능력을 갖고 계셨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설교한 내용을 한번 보십시오. 어떤 사도들이 설명한 것보다 더 깊이 있고 더 탁월했습니다.
빌립 집사님을 보십시오. 초대교회 예루살렘 교회에 핍박이 불어닥쳤습니다. 성도들이 그곳에서 믿음 생활 할 수 없었습니다. 빌립 집사님이 복음을 들고 사마리아로 갔습니다. 사마리아 그 어떤 곳입니까? 기원전 721년 북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 의해서 멸망당한 곳 아닙니까? 군대가 주둔했습니다. 혼혈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마리아 지역을 버렸습니다. 버림받은 땅, 사람들이 아무도 살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땅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땅으로 통행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빌립 집사님이 복음을 들고 갔습니다.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건물로서의 교회가 세워졌다는 말이 아닙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붙들고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했습니다. 그들을 구원시켰습니다. 온 성에 큰 기쁨이 가득 차고 넘쳤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소문이 났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 달려왔습니다. 정말 그렇게 되었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