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선조 임금 시절은 우리나라의 대환란 격변기였습니다. 임진왜란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7년 동안 나라는 초토화되었습니다. 그런데 시절이 인물을 만들어낸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그 시절에 특별하고 탁월한 인물들도 많이 출현했습니다. 충무공 이순신을 비롯하여 서애 유성룡, 율곡 이이 같은 분들이 바로 그 시절을 풍미했던 분들입니다.
그런데 역사에 잘 나타나지는 않지만 이산해라는 분도 있었습니다. 이산해는 11살 때 초시에 장원 급제를 했습니다. 23살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릅니다. 재주가 남달랐고 특별했습니다. 그래서 선조 임금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선조가 그 자리에서 시제를 던지면 시제를 받아서 임금의 마음에 쏙 드는 시를 지어 바칠 정도로 그는 글재주가 아주 총명했습니다. 선조 임금의 사랑을 독차지했고, 결국 이분은 영의정까지 지내게 됩니다.
그런데 후대는 이분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조선 시대 후기에 오면 서원의 시대가 열리는데, 그 당시 나라에 서원이 약 천 개 이상 있었습니다. 서원의 기능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인재 교육을 했고, 또 하나는 조상의 얼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역할을 했습니다. 조선의 위대한 선각자들, 학문이 깊고 뛰어난 분들을 서원에서 한 분씩 정해서 학생들에게 전수하고 가르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조선 시대 후기에 서원 천여 곳 중에 이산해의 업적을 기억하고 가르치는 서원은 단 한 군데도 없었습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그토록 뛰어난 문장가였고, 당대 영의정까지 지냈던 위대한 인물을 왜 후세는 기억하지 않는 것입니까? 조선 시대 인물을 평가한 『명재기언』이라는 책을 보면, 이분에 대한 평가가 짧게 나옵니다. "이산해는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좋았고 지혜로웠고 총명했으나, 간신들의 무리에 휩쓸려서 권력을 쫓아간 사람이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결국 한 사람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당대로서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당대를 지나서 그다음 후대로까지, 세월이 또 다른 세월을 낳아서 시간이 한참 지나야 그분에 대한 입체적이고 종합적인 판단이 이루어지는 법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삶은 지금 평가받는 것보다 후대, 또 그다음 후대에 우리를 평가하는 시각이 달라질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백성들은 과연 누구의 평가를 받아야 할 것입니까?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당대의 평가도 물론 중요합니다. 우리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느냐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후대의 평가도 중요합니다. 잘 살아간 사람에게 후대가 좋은 평가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눈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보고 계시는가? 당대와 후대의 평가보다 더 추상같고, 더 엄격하며, 더 무섭고 공정한 평가가 바로 하나님의 평가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하나님 말씀을 보면, 시므온이라는 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가 나옵니다. 사람들은 그분을 가치 있게 평가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이분을 대단히 가치 있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오늘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눈과 하나님의 평가를 함께 느껴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아버지 요셉은 말씀 중심으로 살아간 인물이었습니다. 이분들은 난지 8일 만에 아들을 할례받게 합니다. 당시 시대적 풍조를 따라서 아들의 이름을 짓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지어 주신 예수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41일째 되는 날 정결 예식을 위해서 성전에 올라갑니다. 그리고 첫아들이니까 하나님께 바칩니다. 번제와 속죄제를 드리는데, 어린 양을 드릴 만한 형편이 되지 못해서 비둘기 두 마리를 가지고 한 마리는 번제로, 한 마리는 속죄제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비록 가난했지만 그 가난이 이들을 성전에 나오는 것을 가로막지 못했습니다.
말씀 중심으로 살아갔던 이 가정이 성전에서 한 특별한 인물을 만납니다. 시므온이었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이분을 우선 평가하기를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의로운 것은 디카이오스(δίκαιος)라는 말을 썼고, 경건한 것은 율라베스(εὐλαβής)라는 말을 썼습니다. 디카이오스와 율라베스라는 말은 하나님과 깊은 관계에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보통 생각할 때 "저 사람은 의로운 사람이야", "저분은 참 경건해 보여"라고 말할 때는 사람 중심의 시각과 판단이 그 속에 들어 있지 않습니까? 저분의 행동을 보니 참 정의롭다, 저분의 믿음생활 하는 것을 보니 저분은 참 경건한 사람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디카이오스, 율라베스라는 말은 사람이 보는 시각을 넘어선 하나님의 관점으로, 하나님과 그 사람 간의 깊은 관계가 전제되어 있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런 의미를 그 당시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 종교 권력자들은 몰랐습니다. 그들은 의롭고 경건한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 노력합니다. 누가복음 18장 11절과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이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즉 사람들과 조금 거리를 두고 서서 기도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형식은 기도를 빌었을지 몰라도 내용은 기도가 아니라 연설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다 듣도록 큰 소리로 자신의 경건과 자신의 삶을 사람들에게 떠들어대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바리새인들은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기도한 자기 자랑은 두 가지였습니다.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는 것을 자랑합니다.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는 것을 자랑했습니다. 금식과 십일조, 이것이 그 당시 사람들의 경건의 지표였고, 자신의 종교적 의로움을 드러내는 수단이었습니다. 이렇게 너무 떠들어대니까 그 당시 사람들이 성전에 가면 바리새인들은 이렇게 기도한다는 소문이 났고, 이 소문이 예수님 교회까지 들어가서 복음서에 기록된 것 아니겠습니까? 그 정도로 그 당시 종교적 열심이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의로움과 경건함을 사람들에게 보이고 인정받으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참된 의로움도 경건도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나오는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의롭다 하셨던 그 장면이 있습니다. 창세기 15장 6절을 보면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배경은 이렇습니다. 자녀 문제 때문에 고민하고 있었던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들판으로 인도해 내시고 하늘의 별을 보여주셨습니다. 너의 자손이 앞으로 저 하늘의 별들처럼 많아질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것을 보시고 하나님은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