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창세기 32:29-32
중국이 낳은 위대한 소설가 루쉰이 1921년에 발표한 「아Q정전」은 널리 알려진 명작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소개되어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소설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주인공 아Q라는 인물은 성밖 절간에 기거하면서 하루하루 날품팔이로 먹고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마저도 술과 도박으로 매일 탕진해 버립니다. 어느 날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혁명군인 척하면서 인생 역전을 꿈꾸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습니다. 그러다가 강도 사건에 연루되어 자신이 하지도 않은 일을 했다고 서명하면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합니다. 그렇게 허무하게 끝나버립니다.
줄거리만 보면 허무하기 짝이 없는 소설인데, 이 작품이 위대한 이유는 아Q라는 인물이 가지고 있는 정신승리의 일관성 때문입니다. 아Q는 주변 사람들에게 항상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돌팔매질을 하고, 동네 불량배들이 돈을 빼앗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그가 취하는 마음 자세가 있었습니다. 동네 아이들이 돌을 던질 때면 이렇게 생각합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사람에게 어떻게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나에게 돌을 던지는 걸 보니 저건 사람이 아니고 짐승임에 틀림없다. 사람인 내가 짐승과 상대하는 것은 옳지 못하니 상대하지 않겠다.' 동네 불량배들에게 돈을 빼앗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신적으로 미숙한 사람이 먹고 살기 위해서 돈을 빼앗는데, 내가 그들과 상대하면 나도 똑같은 미숙한 사람이니 상대하지 않겠다.' 그는 죽을 때도 그렇게 죽어갑니다.
아Q라는 인물을 통해서 루쉰이 드러내고 싶었던 것은 그 당시 중국인들 가운데 깊이 뿌리 내린 병폐였습니다. 그가 말하고자 한 것은 장자 때부터 내려오는 존이불론(存而不論), 즉 '존재하지만 논하지 않는다'는 태도입니다. 예컨대 이런 것입니다. 어느 나라에 기근이 몇 년 동안 들었습니다. 백성들의 삶이 팍팍하고 먹고살기 어려우니 도적들이 들끓고, 사람들의 원성이 자자합니다. 그런데 신하들은 임금 앞에서 백성들의 원성을 말하지 않습니다. 기근이 찾아왔으나 논하지 않고, 도적이 있으나 말하지 않고, 백성이 고통을 받으나 입을 열지 않습니다. 이것이 존이불론입니다. 그러면 임금은 어떻게 합니까. 아무도 말하지 않으니 그 앞에서는 문제가 없는 것이 됩니다. 궁궐에서는 날마다 술판이 벌어지고, 흥청망청 먹고 마시며 지냅니다. 그렇게 나라가 망하는 것입니다.
1921년, 20세기 초반의 중국이 바로 그런 병든 모습이었습니다. 서구 열강의 놀이터가 되고 표적이 되어가는데, 마치 아이들이 돌을 던지듯 매일같이 얻어맞으면서도 정신승리만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세계의 중심이었으니까, 저들은 나라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다'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국인들의 나라를 망하게 한 병폐였습니다. 없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들이 돌을 던지는데, 그 아이들이 없다고 생각한다고 없어지겠습니까. 고통도 당연히 그대로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 신앙의 영역으로 가져와 봅시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존재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도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더 이상 그리스도를 논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을 말하지 않습니다. 성탄을 앞두고 세상에 나가보면, 크리스마스를 축하하고 맞이하는 인파로 넘쳐납니다. 그런데 거기에 그리스도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은 계시지 않고 물건만 있습니다. 사고파는 장사치들만 있습니다. 분명히 계시고 분명히 살아서 역사하시는데,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논하지 않는 것입니다.
야곱의 일생이 그렇지 않습니까. 야곱은 모태신앙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 리브가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꿈속에서라도 만난 것은 벧엘에서였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밧단아람에서 20년 동안 살면서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을 논하지도 찾지도 않고 지냈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하나님이 그를 찾아와서 씨름을 걸어오십니다. 하나님과 씨름하고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고 고백하는 장면이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창 32:29)
고대사회에서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이름을 묻지 않습니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이름을 묻는 것이지, 그 반대는 예의에 어긋납니다. 이는 지금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먼저 야곱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야곱이 하나님께 이름을 묻는 것은 서로 동등한 위치에서 통성명하자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야곱이 하나님께 이름을 물었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간절히 알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이 하나님이 진실로 누구이신지, 지금까지 귀로만 듣던 이 하나님이 진정 어떤 분이신지 궁금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물어본 것입니다. 모세도 그러했습니다. 430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동안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에서 모세를 만나주셨을 때, 바로에게 가라고 하십니다. 모세가 묻습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겠습니까. 그들이 누가 나를 여기로 보냈냐고 물으면 제가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까닭은 자신의 이름을 말씀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이름이라는 것은 존재의 규정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낳으면 이름을 짓지 않습니까. 부모의 염원을 담아서 이름을 짓습니다. 부모가 자식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라주었으면 좋겠다, 이런 존재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하나님 이전에 존재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셨습니다. 하나님 이전에 누구도 계시지 않았고, 누구도 하나님의 존재를 규정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말씀하실 수 없습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모세도 그러했고 야곱도 그러했습니다. 하나님 그 자체를 알고 싶었습니다. 오늘 이 질문은 야곱의 믿음이 한 단계 성장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전환점이 됩니다. 지금까지 야곱은 하나님에 대해서 궁금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궁금했던 것은 물질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돈을 벌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장자권을 차지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사랑을 쟁취할까. 이런 것이 궁금했지, 하나님에 대해서는 궁금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인생이 궁금했습니다. 자기 인생이 성장하고 발전하고, 부자가 되고 흥왕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지, 하나님에 대해서는 알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저 자신의 성공을 위한 디딤돌에 불과한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야곱은 그런 것을 모두 내려놓고 하나님 자체가 궁금해졌습니다. 이것이 그의 믿음이 성장했다는 증거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무엇이 궁금했습니까. 아니, 지금도 무엇이 제일 궁금합니까. 내 인생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10년 뒤에 묻어놓았던 것이 터져서 부자가 될 수 있을 것인지, 내 자녀의 미래는 어떨지, 내 인생이 꽃피는 날이 언제쯤 될지, 막혔던 것이 언제쯤 뚫리게 될지. 그것이 궁금해서 하나님께 나와 묻고 여쭈고, 뚫어달라고 해결해 달라고 매달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정작 하나님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런데 어느 한 순간 우리 믿음이 성장하면, 그런 것이 없어도 하나님이라는 존재 자체가 궁금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알고 싶어집니다. 그때가 우리 믿음이 성장한 때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궁금하게 여기는 야곱에게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창 32:29)
이것이 논리적으로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이름을 물었으면 이름을 대답해 주어야 하지 않습니까. 아니면 말씀하지 않으시든지. 그런데 하나님이 그냥 축복하셨습니다. 축복하셨다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그 다음을 빨리 읽어봅니다. 축복의 내용이 무엇인지, 하나님은 무엇에 대해서 축복하셨을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