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은 1418년부터 1450년까지 32년 동안 재위했습니다. 세종대왕이 조선을 다스렸던 32년의 기간은 조선 사회가 혁신에 혁신을 거듭했고, 사회 전반에 걸쳐 새로운 바람이 활기차게 불었던 시기였습니다. 그 가운데 과학기술 분야는 장영실과 함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장영실은 원래 동래현의 관노였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워낙 특별하고 탁월했던지라 세종대왕의 귀에까지 들어갑니다. 그래서 세종대왕이 장영실을 중국에 유학 보냅니다. 유학을 다녀온 장영실을 세종대왕은 세종 5년인 1423년에 면천시켜 줍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자신의 과학기술 분야를 책임지는 사람으로 임명합니다. 물론 전국 방방곡곡에서 반대하는 상소가 빗발쳤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뚫어내고 결국 장영실과 함께 조선의 과학기술을 세워갑니다. 두 사람은 사실 신분에 있어서는 하늘과 땅 차이에 있지 않습니까? 한 분은 조선의 임금이고 한 분은 노비 출신입니다. 그런데 두 분의 공통점이 굉장히 많습니다. 두 사람의 공통점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 한 가지만 꼽으라면 두 분 다 기본에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세종대왕은 백성들보다 항상 한 걸음 혹은 두 걸음 앞서가야 된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늘 새벽 4시만 되면 일어났습니다. 책을 읽고 준비하고, 신하들과 함께하는 경연에 빠진 적이 없습니다.
어떤 분야든지 잘 준비해서 경연에 와서 치열하고 열띤 토론을 했습니다. 그 열매를 백성들이 거두었습니다. 장영실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분이 물시계를 만들 때는 물방울 떨어지는 속도를 계산하기 위해서 수천 번, 수만 번이나 똑같은 실험을 계속했습니다. 해시계를 만들 때는 해가 물체를 비추는 그림자를 그리기 위해서 1년 365일 동안 해와 물체만 바라보고 그림을 그린 적도 있습니다. 그만큼 성실했고 기본에 충실한 분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세종대왕이나 장영실이나 모두가 다 천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천재처럼 보일 뿐이지 사실은 기본에 충실한 대단히 성실한 분들임에 틀림없습니다.
기본에 충실한 것이 과연 쉬울까요? 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그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똑같은 일을 매일같이 지속적으로 계속 반복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내가 다 안다고 생각해야 되는데, 그런데 또 하라고 합니다. 두 번, 세 번 지속적으로 계속 반복하는 일이 지겹기도 하고 피곤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계속 그 일을 반복해 나갑니다. 이 기본을 계속 반복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것을 반복하지 않으면 내 몸에 배이지를 않습니다. 계속 반복해야 내 몸에 배이고 내 영혼에 배입니다. 그러면 눈 감고도 그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기본이 내 몸에 습득이 되면 그다음에 거기서부터 응용할 수 있습니다. 기본이 탄탄하면 거기서 성장하고 발전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본에 충실하지 않으면 성장이 더딥니다. 그것이 불가능해집니다. 우리 믿음 생활, 신앙생활 하시는 분들 그 기초의 토대가 무엇이겠습니까? 두말할 것 없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입니다. 말씀이 우리 삶의 토대가 되어야 됩니다. 그러면 그 토대가 굳건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것을 굳건하게 하려면 매일 똑같이 하나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그 말씀을 되뇌이고 말씀대로 살아가야 됩니다. 그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다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다 알지를 못합니다. 여전히 안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하나님 말씀을 보면 요셉과 마리아, 아기 예수님의 가정이 나옵니다.
이 가정은 하나님 말씀인 기본에 성실했습니다. 이 가정을 살펴보고 과연 우리가 말씀에 충실한 사람들인지를 함께 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21절을 보십시오. "할례할 팔일이 됨에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잉태하기 전에 천사가 일컬은 바러라." 할례할 팔일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아기가 태어나고 유대인 율법에 의하면 성경 그대로 8일 만에 할례를 했다는 말입니다. 구약의 율법에 그대로 명시되어 있습니다. 남자 아기가 태어나면 8일째 되는 날 할례를 행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가정은 말씀대로 8일 만에 할례를 행합니다. 그리고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고 짓습니다. 이 이름을 누가 지어준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서 수태고지할 때 마리아에게 주신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이 아기의 이름은 하나님께서 주신 이름입니다. 그 당시 문화적으로, 그 당시 관습적으로 우리가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이야기를 통해서도 알아보았지만 사실 그 당시에는 아기의 이름을 지을 때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짓거나 그 친족들 중에 유력한 사람, 성공한 사람이 있으면 그분의 이름을 따라서 지었습니다. 그것이 시대적 관행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가정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이미 아기의 이름을 하나님께서 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가정은 그 이름을 예수라고 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이 무엇입니까?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어주신 이름대로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고 짓고 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행합니다. 모두가 다 말씀대로 따라서 행한 일들입니다. 22절을 보십시오. "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이제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간 이유는 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의 때가 찼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레위기 율법에 의하면 산모가 아기를 낳으면 8일 만에 할례를 행합니다. 그때부터 33일이 또 지나야 산혈이 깨끗해진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41일째 되는 날 성전에 올라가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전에 올라가서 두 가지를 해야 됩니다. 예배를 드려야 되는데 하나는 번제를 드립니다. 또 하나는 속죄제를 드립니다.
이것이 구약의 율법에 명확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레위기 12장 6절 말씀을 보십시오. "아들이나 딸이나 정결하게 되는 기한이 차면 번제를 위하여 일 년 된 어린 양을 가져가고 속죄제를 위하여 집비둘기 새끼나 산비둘기를 회막 문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산혈이 깨끗하게 되는 날, 정결예식이 끝나는 날 그날 성전에 올라가서 어린 양 한 마리를 가지고 번제를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비둘기를 가지고 가서 속죄제를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 그대로 이제 41일째 되는 날 마리아와 요셉 그리고 아기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서 정결예식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그대로 행하고 있지 않습니까?
또 성전에 올라간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처음 태어난 자는 다 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지키고 그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이 가정이 이 가정에 처음 태어난 아기 예수를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서 올라간 것입니다. 이것도 부모의 결정과 부모의 결단을 따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에 그대로 기록된 대로 순종한 것입니다. 출애굽기 13장 2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태에서 처음 난 모든 것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이렇게 첫 것은 다 내 것이라고 말씀하신 배경이 있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출애굽할 때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이 장자의 죽음입니다. 애굽의 모든 사람들은 다 장자가 죽임을 당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 문설주와 인방에 피를 바르고 그 안에 있었던 자들은 하나님께서 장자의 죽음을 면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때부터 초태생들 즉 장자, 그 가정에 태어난 첫 것은 모두가 다 하나님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의 전통을 따라서 지금 요셉과 마리아는 처음 태어난 아들 예수를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서 올라간 것입니다. 21절에서 23절의 말씀을 한번 정리해 봅시다. 너무 깔끔하고 담백하지 않습니까? 요셉과 마리아, 자기 생각이 여기에 들어가 있는 것이 있습니까?
그들은 모두가 다 하나님 말씀 율법에 기록된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8일 만에 할례 행하라고 하니 할례 행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라고 하니 예수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정결예식을 위해서 산혈이 깨끗해지는 41일째 되는 날 성전에 올라가라고 하니 올라갔습니다. 번제와 속죄제를 위해서 예물을 가지고 올라갔습니다. 첫 것은 다 내 것이라고 하셨으니 첫 것, 즉 첫 아들 예수님을 드리기 위해서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여기에 군더더기가 어디에 있습니까? 자기 생각이 어디에 있습니까? 모든 것 다 하나님 말씀대로 그대로 행하고 있는 가정이 바로 요셉과 마리아의 가정입니다. 이것이 대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대로 그 당시 사회에서 율법대로 행하는 것이 뭐가 그리 대단하냐고요? 대단합니다.
왜냐하면 그 시대의 윗물들이 다 썩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종교 지도자들, 종교 권력들, 종교 기득권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은 있으나 말씀대로 행하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생활을 하실 때 우리 주님이 성전을 청결하게 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성전 정화 사건입니다. 왜 하셨습니까? 유대인의 율법에 의하면 만 20세 이상의 남자들은 세 번의 명절에 성전에 올라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때마다 예물을 가지고 가야 됩니다. 멀리서 오는 사람들 소나 양이나 짐승을 가지고 올 수가 없기 때문에 예루살렘 안에 가축시장이 있습니다. 그런데 종교 지도자들은 멀리 있는 가축시장 말고 성전 안에 가축시장을 열어줍니다. 물론 자릿세를 받았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 하나님이 정하신 거룩한 절기를 이용해 먹은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 안에 비둘기 파는 자들, 돈 바꾸는 자들, 소와 양을 파는 자들이 다 들어와서 판을 치고 있었습니다. 짐승의 소리가 성전 안을 시끄럽게 만듭니다. 그 짐승들이 배설한 오물들이 코를 찌릅니다.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돈 바꾸는 자들은 거기 왜 있었겠습니까? 성전 안에서 유대인의 화폐만 통용시켰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는 이미 망했습니다. 화폐가 없습니다. 로마 화폐가 공용 화폐 아닙니까? 그런데 그들은 여전히 쓰지도 않는 유대인 화폐를 거기에서 쓰라고 합니다. 로마 화폐와 바꿉니다. 환율은 그들이 부르는 것이 값입니다. 그런 식으로 돈벌이를 했습니다. 돈 바꾸는 자들에게도 자릿세를 받고 그 자리를 내어주었습니다. 그만큼 윗물이 썩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의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에는 내 아버지의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되어 있는데, 아버지의 집에서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 현실, 아버지의 집에서 돈벌이하고 장사하는 자리만 가득 찬 현실, 이 현실을 우리 주님이 고발하신 것입니다. 그만큼 그 시절이 부패하고 썩어 있었습니다. 그런 시절에 윗물이 다 썩어 있는데, 저 하층민으로 살고 있었던 목수의 가정 요셉과 마리아는 담백하고 깨끗하게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고 지켜내고 있습니다. 이것이 대단한 것 아닙니까? 시대적 분위기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회적 흐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다들 그렇게 살고 있지 않는데 왜 우리 가정만, 왜 나만 이런 마음이 들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가정은 있는 말씀 그대로 순종하고 지켜내고 있습니다.
이보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구약시대, 사사시대를 만납니다. 사사시대의 시대정신이 무엇입니까? 악한 시대정신입니다. 그 시대에 왕이 없으므로 백성들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던 시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왕이 되어야 하는데 말씀대로 살지 않는 시절이 그 시절입니다. 백성들은 다 자기 멋대로 살아갑니다. 타락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하게 여기고 지켜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방 여인 룻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 붙잡고 홀로 된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서 베들레헴까지 옵니다. 시어머니 나오미를 봉양하기 위해서 이삭을 주우러 일터로 나갑니다. 말씀대로 살았던 여인 아닙니까? 베들레헴 공동체는 나그네를 박대하지 말고 환대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이방 여인 룻을 껴안아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