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창세기 31:30-42
아이슬란드는 북유럽의 섬나라입니다. 이 나라의 GDP는 전 세계 105위 정도에 불과합니다. 우리나라는 이에 비해 GDP가 전 세계 13위 정도이니, 경제 규모로 보면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국민행복지수라는 개념으로 넘어가면, 이 나라 국민들이 우리보다 훨씬 행복합니다. 들여다보면 이 나라에서는 실패가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고, 직업에 대해 사람들이 서로를 존중합니다. 아이슬란드에는 작가가 많고, 예술가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관점에서 작가라 하면 책을 출판했는지, 그 책이 얼마나 팔렸는지, 서점 순위에 올라 있는지, 그 사람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는지로 판단합니다. 그러나 아이슬란드에서는 글을 쓰고 있기만 하면 누구나 작가입니다. 스스로 작가의 정체성을 가지고 "저는 글을 쓰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면, 그 사람은 작가로 대접받습니다. 예술가도 마찬가지입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의 통계에 따르면, 작년 기준 우리나라 우울증 환자 수가 100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더 심각한 수치는 그중 20대와 30대가 30만 명을 초과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 젊은이들이 성공에 대한 부담과 실패에 대한 불안을 얼마나 깊이 안고 살아가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미국 실리콘밸리에서는 2008년부터 매년 연례적으로 열리는 행사가 있는데, '페일콘(FailCon)'이라는 행사입니다. 실패를 뜻하는 'fail'과 모임이나 회의를 뜻하는 'conference'가 합쳐진 이름입니다. 벤처기업가들이 실리콘밸리에 모여서 자신이 얼마나 실패했는지, 왜 실패했는지, 어리석고 잘못된 판단으로 무엇을 그르쳤는지를 하루 종일, 일주일 내내 자신의 실패담을 나누는 자리입니다.
2008년에 시작된 이 행사는 지금까지 성황리에 지속되고 있습니다. 실패담을 듣는 사람들은 타인의 실패를 손가락질하지 않고, 자신의 성공을 위한 밑바탕으로 삼습니다. 실패담을 나누는 사람들은 자신의 실패를 가감 없이 나누면서 사회가 성공을 향하여 더 나아가도록 실패를 공유합니다. 핀란드에서는 매년 10월 13일을 '실패의 날'로 정해 두었습니다. 그 주간에는 일 년 내내 겪었던 실패를 모아서 함께 나눕니다. 사회공동체가 실패에 대해 관대하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를 본받아 올해 처음으로 10월 13일부터 11월 3일까지 카이스트에서 '실패나눔 대행진' 행사가 열렸습니다.
카이스트는 전국의 수재들이 모인 곳입니다. 고등학교 시절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던 학생들이 카이스트에 가 보니, 거기에도 1등이 있고 꼴찌가 있습니다. 그 실패를 어떻게 견디겠습니까. 죽고 싶고, 도망가고 싶고, 견디기 힘든 시간들이 지속되는데, 그 실패담을 털어놓고 나누는 자리입니다. 올해 처음 이 행사를 열었는데 실패담을 나누고자 하는 학생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교회로 가져와 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들어왔던 간증을 떠올려 봅니다. 실패담이 많습니까, 성공담이 많습니까. 간증은 실패담보다 성공담이 훨씬 많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실패한 이야기를 간증이라고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는지도 모릅니다. 사업 성공에 대한 간증, 자녀 입시 성공에 대한 간증, 병의 치유에 대한 간증을 들을 때는 박수치며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그러나 뒤돌아서면 마음이 공허하고 자괴감이 밀려옵니다. '하나님은 저분만 사랑하시는가 보다. 나는 왜 자꾸 실패할까.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노력하는데 왜 내게는 열매가 없을까. 저 사람은 성공해서 밝은 얼굴로 간증하는데 나는 왜 이러한가.'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습니까. 그러나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야곱의 입을 통해 우리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야곱은 라반 때문에 화가 나서 자신의 인생 여정들을 다 쏟아 놓고 토로합니다.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고생담입니다. 그런데 그 속을 들여다보면, 하나님께서 함께하신 세세한 은혜가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우리 인생도 아마 그러할 것입니다.
오늘은 추수감사 주일입니다. 추수감사 주일에 하나님 앞에 풍성하게 드리고 싶은 마음은 성도라면 누구나 지니고 있습니다. 일 년 동안 열심히 살았으니, 이만큼 남겼다고 하나님 앞에 올려드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그러나 분투하며 살았는데도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고, 드릴 것이 없어 민망하고 부끄러울 때가 있습니다. 올해도 내 인생은 실패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 인생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면,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면면이 녹아 있는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네가 네 아버지 집을 사모하여 돌아가려는 것은 옳거니와 어찌 내 신을 도둑질하였느냐" (창 31:30)
라반이 야곱을 쫓아온 명분은 드라빔을 되찾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라헬이 드라빔을 도둑질하여 가져온 것을 야곱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라반은 드라빔을 핑계 삼아 자기 딸들을 데려가고, 손자들을 데려가고, 짐승들을 찾아가려 한 것입니다. 야곱은 이런 상황을 전혀 몰랐기에 자신 있고 당당했습니다.
"외삼촌의 신을 누구에게서 찾든지 그는 살지 못할 것이요 우리 형제들 앞에서 무엇이든지 외삼촌의 것이 발견되거든 외삼촌에게로 가져가소서 하니 야곱은 라헬이 그것을 도둑질한 줄을 알지 못함이었더라" (창 31:32)
모르고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고대 근동의 관습에 따르면 신상을 도둑질한 자는 살려 두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야곱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라반은 야곱 일가를 수색하기 시작합니다. 장막을 수색하고 소지품을 다 뒤집었습니다. 그러나 찾을 수 없었습니다. 눈치 빠른 라헬이 드라빔을 낙타 안장 아래에 숨기고 그 위에 걸터앉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생리를 핑계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수색을 아무리 해도 드라빔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반이 안장을 뒤지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입니다. 라반처럼 집요하고 주도면밀한 사람이 눈이 시뻘개져서 드라빔을 찾고 있었는데, 그것을 찾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야곱은 라헬이 드라빔을 도둑질해 갔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 부부 사이의 불일치가, 부부 간에 서로 소통하지 않음이 이 가정을 완전히 불태워 버릴 뻔했습니다. 야곱은 라헬이 한 일을 몰랐고, 라헬은 자기가 한 일을 남편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부부 간에 서로 소통하지 않고 불일치가 이처럼 심각한 위기 상황을, 가정 전체를 큰 위기로 몰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에덴에서 가정을 창설하시고 가정의 원리를 말씀하셨는데, 그 가운데 핵심적인 원리가 이것입니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창 2:25)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서로가 투명했다는 뜻입니다. 숨길 것이 없었고, 부끄러울 것이 없었고, 가릴 것이 없었습니다. 부부는 모름지기 그래야 합니다. 서로 간에 숨기는 것이 없어야 하고, 감추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만약 감추는 것이 가슴속에 하나 있으면 그것은 작은 불씨가 됩니다. 두 개가 있으면 그 불씨가 두 배로 커집니다. 감추는 것이 점점 많아지면 큰 불이 됩니다. 그 불은 나를 태우고, 상대방도 태우고, 가정 공동체를 모두 태워 버립니다. 야곱과 라헬이 바로 이런 상황이었습니다. 라헬이 한 일을 야곱은 몰랐고, 그 가정은 완전히 불타 버릴 뻔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