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창세기 30:3-13
역사는 과거를 살피고 들추어내며 반추하는 학문입니다. 역사는 과거의 자료를 찾아서 의미를 발견해야 하는데, 자료를 발견하기도 어렵고 자료를 찾았다 해서 거기서 의미를 찾아내는 것은 더더욱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역사는 가장 탁월한 미래학입니다. 어떻게 이 논리가 성립될 수 있을까요? 과거를 살피는 역사가 어떻게 미래를 준비하는 미래학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조금만 생각해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한없이 짧은 인생입니다. 어떤 한 사람이 천 년 만 년을 살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한정된 시간을 살아갑니다. 한번 실수하고 두 번 실패해서 쓰러지고 넘어지면 다시 일어서기가 어렵습니다. 다시 일어서서 궤도 위로 올라오는 데 시간이 필요하고, 에너지가 필요하며, 물질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해서 몇 년의 시간을 허비하고 나면 이미 기력도 쇠하고 젊은 사람은 나이가 들어갑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없기 때문에 실수하고 실패하는 것은 인생에 치명적입니다.
그런데 역사를 보면, 과거를 보면 나와 똑같은 상황에서 선택한 사람들의 결과가 나옵니다. 어떤 이는 지혜롭게 좋은 선택을 해서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고, 어떤 이는 어리석고 미련한 선택을 해서 망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를 보고 나는 똑같은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찾아내고 발견해야 합니다. 역사가 탁월한 미래학이라고 불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과거 수나라가 남북조의 혼란을 수습하고 통일 왕국을 이루었습니다. 수나라가 거대하고 넓은 중국 대륙을 통일했는데, 마침 그때 598년 고구려의 영양왕이 중국의 요서 지방을 기습적으로 공격하여 전략적 요충지를 빼앗아 버리는 일이 일어납니다. 통일 제국을 이룬 수나라로서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습니다. 거대한 대륙의 지배자인데 저 변방에 있는 고구려에게 당했다니, 이를 갈며 시간을 한참 동안 가지고 준비했습니다.
드디어 때가 됩니다. 612년 어느 날 수나라의 양제가 113만 명이라는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쳐들어옵니다. 지도에서 없애 버릴 심산으로 쳐들어온 것입니다. 그런데 고구려는 침착하게 수나라 대군을 막아냅니다. 요서 지방의 전략적 요충지에서 한 번 걸러내고, 평양성에서 두 번째 걸러냅니다. 원하는 대로 싸움이 진행되지 않자 수나라 양제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습니다. 그래서 주력 부대 30만 명을 청천강 살수로 보냅니다. 하지만 살수에는 을지문덕 장군이 있었습니다. 살수대첩으로 30만 대군이 거의 몰살하고 몇천 명만 살아서 돌아갑니다. 113만 명의 대군을 빌려 왔지만 살아남은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게 612년입니다.
그런데 돌아가서 반성하지 않습니다. 분석하지 않습니다. 전쟁에서 왜 졌는지 살피지 않습니다. 그 이듬해 613년 다시 군사를 일으켜서 고구려를 쳐들어옵니다. 이번에는 요동에도 미치지 못하고 다시 돌아가야 했습니다. 본국에서 반란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오지도 못하고 다시 돌아가서 반란을 제압했습니다. 이제 약이 올라 죽을 것 같습니다. 614년 3차 침공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미 그때는 수나라가 힘이 다 빠져 버렸습니다. 고구려는 가만히 앉아서 수나라를 방어하면서 힘이 더 강해집니다. 결국 수나라는 3차 침공에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국력을 지나치게 낭비했습니다. 결국 618년 당나라에 의해서 수나라는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고구려는 생각보다 강한 나라였습니다. 겨울은 길고 성은 산성에 있어서 높습니다. 춥고 기간이 길어지면 보급로가 차단되고, 먹고 살 길은 없어지며, 군사들은 동상에 걸립니다. 그게 패인인데 패인을 분석하지 않아서 두 번 세 번이나 침공하고 과거를 돌아보지 않고 돌이키지 않은 나라는 미래 없이 망해버리고 만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야곱과 라헬과 레아의 어리석음이 나옵니다. 이들은 아브라함이 실패한 길을 따라갑니다. 잘못된 길을 또다시 답습합니다. 오늘 이들의 실패를 보고 이들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고 있는지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라헬이 이르되 내 여종 빌하에게로 들어가라 그가 아들을 낳아 내 무릎에 두리니 그러면 나도 그로 말미암아 자식을 얻겠노라 하고 그의 시녀 빌하를 남편에게 아내로 주매 야곱이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창 30:3-4)
이 모습은 어디선가 익숙한 모습이 아닙니까? 아브라함이 하갈에게서 아들을 취하는 모습, 우리는 이 모습을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창 16:2)
이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브라함이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은 결과가 행복했습니까? 평안했습니까? 모두가 다 즐거웠습니까? 이건 이미 실패한 작전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의 자녀 이삭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습니다. 시간이 지나서 진짜 약속의 자녀 이삭이 태어납니다. 그 과정에 불화가 일어납니다. 결국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쫓아야 했습니다. 그 안에서 심각한 갈등들이 그 가정에 계속해서 내려오고 있습니다.
결국 이삭은 이스마엘 때문에 힘겨워했고, 야곱의 형 에서는 아버지 이삭을 괴롭게 하려고 이스마엘의 딸과 결혼하지 않습니까? 야곱의 할아버지가 아브라함입니다. 야곱이 이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선택하는 것은 온 가족 모두에게 실패와 패망이 온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다 알고 있습니다. 이미 실패한 이유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이 길을 걸어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미 실패했는데,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명명백백하게 역사를 통해서, 자기 집안의 역사를 통해서 다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야곱이 이런 미련한 선택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두 가지 정도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죄가 또 다른 죄를 낳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가정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이루는 가정입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에덴에서 가정을 창설하실 때 아담과 하와를 짝 지으시고 가정을 선포하셨지 않습니까? 그런데 야곱의 가정을 보십시오. 처음부터 기형적이었습니다. 일주일 사이에 두 여자를 아내로 맞이합니다. 그런데 이 여자들은 한 집안의 자매들이었습니다. 처음부터 이 가정은 죄로 시작된 가정입니다. 기도하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선택을 해서 시작된 가정 아닙니까? 처음부터 틀려 먹었습니다. 그로 인해서 가정의 각종 불화와 두 여인 사이의 시기와 질투와 다툼이 끊이질 않습니다.
첫 출발이 잘못됐습니다. 처음에 죄로 시작하니까 두 번째, 세 번째가 쉬워집니다. 아내가 둘이었는데 셋은 또 무슨 문제가 되며, 넷은 또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그렇게 죄를 쉽게 용인해 간 것입니다. 우리가 죄 지을 때도 역시 마찬가지 순서를 지납니다. 처음에 죄 앞에 섰을 때는 두렵고 떨립니다. 죄가 주는 말초적 달콤함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렵습니다. 이 선을 넘어가면 죄인데, 이 죄를 내가 잡으면 죄를 짓는 것인데 망설여지고 불안합니다.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는데 내가 이렇게 해도 되나 싶습니다. 그런데 덥석 그걸 잡아 버립니다. 그 선을 넘어가 버립니다. 그러면 두 번째, 세 번째는 쉽게 들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