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본문: 창세기 30:1-8

1958년 안도 모모후쿠가 라면을 개발한 이후로 라면은 전 세계인이 사랑하는 기호식품이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라면은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어떤 이들은 거의 주식처럼 라면을 먹기도 하고, 야식으로도, 간식으로도 라면을 즐깁니다. 그런데 이렇게 좋아하는 라면이 왜 국수와는 달리 꼬불꼬불하게 되어 있는지 생각해 본 분들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에는 과학적인 비밀 두 가지가 함께 녹아 있습니다.

첫 번째는 라면이 부서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입체적인 형태, 3차원적 형태로 꼬불꼬불하게 만들어 놓으면 힘을 받을 때 그 힘이 분산되어 운반 과정에서 귀퉁이 부분이 잘 부서지지 않습니다. 보관에 용이하기 때문에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조리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서입니다. 인스턴트 식품에서 조리 시간은 거의 생명처럼 중요한데, 뜨거운 물에 라면을 넣고 끓이면 꼬불꼬불한 면 사이로 뜨거운 물이 빠르게 순환하면서 빨리 골고루 익습니다.

사람들이 먹는 라면, 자취생의 배고픈 한 끼를 해결해 주는 라면도 만든 이유가 이렇게 분명히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운행하시고 천지를 이루어 가시는 방식에 어찌 이유가 없겠습니까? 돌아보면, 한 걸음 떨어져서 곰곰이 생각하고 묵상해 보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운행하시는 방식에는 다 이유가 있고 원인이 있습니다. 그중에 창조의 으뜸이고 피조물 중에 으뜸인 우리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도 다 이유가 있습니다. 내 인생의 크고 작은 일들이 일어나는데 이 일에 이유가 없을 수가 없습니다. 돌아보면 원인이 있고 이유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우리 인생에 일어나는 일에 원인과 이유를 찾지 못하기도 합니다. 왜 자기 인생인데 나에게 일어나는 일의 이유를 찾지 못할까요? 그것도 생각해 보면 한두 가지 정도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자기 자신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성격이 괴팍합니다. 말도 함부로 하고 화도 불같이 잘 냅니다. 그러면 그 주변에 누가 붙어 있겠습니까? 그 옆에 있다가 불호령이 떨어질까 봐 두려워서 사람들은 곁에 가기를 두려워하고 싫어할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를 돌아보지 않으면 이분은 불평합니다. "왜 내 주변에는 사람이 없느냐, 좋은 사람이 내 곁에 왜 오지 않느냐"고 불평합니다. 자기 스스로를 돌아보면 금방 알 텐데, 자기 성격이 그런 것을 금방 알 텐데, 자신을 돌아보지 않으니 자기 인생에 일어나는 일의 이유를 모르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상황을 객관적으로, 입체적으로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눈으로만 상황을 보면 문제가 풀리지 않습니다. 타인의 눈으로 봐야 하고, 가족의 눈으로 봐야 하고, 공동체 식구들의 눈으로 봐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신앙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시선으로 우리 인생에 일어나는 일을 봐야 합니다. 그러면 문제의 원인이 보입니다. 그것을 못하니까 문제는 일어나는데 원인을 찾지 못하고, 원인을 찾지 못하니 똑같은 문제가 계속 반복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야곱과 라헬에게 심각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갈등이 심각해집니다. 갈등은 있는데 이 두 사람이 그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이 가정에 왜 문제가 일어났으며,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내 인생에 일어나는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완벽을 꿈꾼 여인의 절망

레아는 아버지에게 이용당했습니다. 남편에게도 사랑을 받지 못합니다. 그런데 레아는 남편의 사랑을 계속해서 갈망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레아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레아에게 태의 문을 열어 주시고 자녀를 선물로 주십니다. 르우벤, 시므온, 레위까지 세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세 아들을 낳아도 여전히 목마릅니다. 남편의 사랑이 자신을 향하지 않기 때문에 여전히 괴롭습니다.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계속해서 남편의 사랑을 그리워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네 번째 아들을 주신 후부터 그가 달라집니다. 유다를 낳았습니다. "이제는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이제는 레아의 시선이 사람을 향하다가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믿음이 성장했습니다. 고통이 있었는데, 어려움이 있고 고난이 닥치고 괴로웠는데, 이제는 그의 시선이 사람 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고통을 통해서, 어려움을 통해서 한층 깊어지고 믿음은 더 좋아지고 신앙이 성장했습니다.

반면, 라헬은 어떻게 지냅니까? 라헬은 레아와의 경쟁에서 승자 독식을 한 사람입니다. 레아가 그토록 기대하고 원했던 남편의 사랑이 라헬에게 집중되어 있지 않습니까? 남편의 사랑은 철저하게 라헬 중심입니다. 그런데 이런 라헬도 가지지 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서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의 언니를 시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창 30:1)

충격적인 말을 합니다. "내가 죽겠노라." 거칠고 과격한 말을 합니다. 죽어버리고 싶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보면 지금 라헬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몹시 불행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라헬을 이렇게 죽고 싶도록 불행하게 만든 것일까요?

라헬은 완벽한 인생을 꿈꾸었던 여인입니다. 창세기 29장 17절에 보면 레아와 라헬을 비교해서 설명하는데, 레아는 시력이 약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미모가 좋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아름다웠습니다. 타고난 미모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남편의 사랑도 독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세상의 어느 남자가 이 한 여인을 얻기 위해서 14년 동안이나 종처럼 일하겠습니까? 그런데 야곱은 라헬을 얻기 위해서 14년 동안이나 종처럼 일했습니다.

그런데 딱 한 가지가 모자랐습니다. 자녀가 없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그녀는 죽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라헬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내 품에는 아들을 안고, 등 뒤에는 남편의 든든한 사랑이 배경이 되고 울타리가 되고, 타고난 미모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사랑받으며 평생을 누리고 살고 싶다." 그런데 그중에 딱 한 가지 안 되는 것이 있으니 자녀가 없습니다. 이것이 라헬에게는 심각한 고민이고 문제였고, 그것 때문에 그녀는 죽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지금까지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이 됩니까?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라헬에게 부어준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타고난 외모를 주셨습니다. 야곱의 사랑을 하나님이 허락해 주셨습니다. 야곱은 라헬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시간을 들였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내가 받아왔고 누려왔던 모든 일들은 하나도 감사하지 않습니다. 딱 한 가지 모자란 것 때문에, 딱 한 가지 내 인생에 자녀가 없는 것 때문에, 지금까지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감사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객관적으로 한번 보십시오. 라헬이 어떤 사람입니까? 다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볼 때는 열 가지를 다 가지고 있는데 한 가지가 모자랍니다. 그런데 그 한 가지 때문에 자기 인생에서 지금까지 가져왔던 모든 것을 다 부정하고 남을 만큼 그녀는 괴롭습니다. 이것은 신앙인의 자세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지금까지 베풀어 주셨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앙의 사람들은 나에게 한 가지 모자란 것조차, 결여조차, 부족한 것조차 오히려 은혜가 됨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돌아보면 성경 전체를 보면, 결여된 것, 모자란 것이 오히려 축복이 된 경우가 많습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다윗은 모자라는 것이 많은 인간이었습니다. 아버지 이새의 집에 사무엘 선지자가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 가장 특별했고 탁월한 하나님의 사람이 자기 집에 왔습니다. 보통의 아버지 같으면 그 집에 있는 모든 식구들을 다 불러 모아서 사무엘에게 안수기도 받게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시각 다른 형들은 다 그 집에 모여 있는데, 다윗은 들판에서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에게도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아버지가 그를 불러들이지 않은 것입니다. 다른 일곱 형들은 다 그 집에 불러왔는데 다윗은 아버지가 아예 만나지도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아버지에게도 사랑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하는, 모자란 구석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렇게 노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