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 년을 섬기리이다

본문: 창세기 29:11-20

몇 년 전부터 우리는 방송과 연애 프로그램에서 '본캐'와 '부캐'라는 말을 자주 들어왔습니다. 원래 이 말은 게임에서 시작된 것으로, 본 캐릭터와 부캐릭터를 줄여 부른 표현입니다. 이 말이 일상 용어로 옮겨오면서 본업, 곧 원래 자신이 잘하고 생업으로 삼는 일을 본캐라 부르고, 취미로 하는 일이나 평소에 못했던 것을 부캐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본캐와 부캐가 있는 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부캐가 본캐를 삼킬 때, 역전 현상이 일어날 때 생깁니다.

예를 들어 어떤 개그맨이 있었습니다. 본업은 개그맨인데 원래 노래를 좋아해서 대중 앞에 서서 노래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대중들이 이분의 노래를 좋아해주고 환호해주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본캐보다 부캐, 곧 개그보다 노래에 더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대중의 관심이란 변덕스러워서 그토록 좋아하다가 갑자기 차갑게 식어버렸습니다. 이제는 노래할 수 없게 되어 원래 본업으로 돌아와야 하는데, 돌아오려 하니 자리가 없었습니다. 자기가 자리잡고 있던 그곳에 잠깐 떠나 있던 사이 후배들이 들어와 그 자리를 차지해버린 것입니다. 갈 곳이 없습니다. 부캐가 본캐를 삼켜버린 것입니다. 비본질이 본질을 삼켜버린 역전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이와 경우는 조금 다르지만 비슷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최근 우리는 제25회 국제스카우트 세계잼버리 대회를 새만금에서 열었습니다. 탈도 많고 문제도 많았던 대회였는데, 대회 초반의 혼란을 중앙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지자체가 이를 떠맡고 기업이 들어가고 각 개인 봉사자들이 들어가서 어쨌든 마무리했습니다. 마지막은 상암에서 케이팝 콘서트로 피날레를 장식했습니다. 그런데 끝나고 나서도 왠지 불편하고 찝찝한 마음을 지울 길이 없었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본질적인 의미의 대회는 이미 기능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본질적인 의미의 국제스카우트 세계잼버리 대회라는 것이 기능적으로는 이미 실패한 것입니다. 비본질적인 것들, 우리나라를 관광시켜주고 케이팝 콘서트를 열어주고 이것으로 언론에 도배를 했지만, 사실은 내용적으로 본연의 의미가 퇴색했습니다. 그렇다면 실패한 대회가 아닙니까?

우리 인생에도 이런 일이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인생길 아주 중요한 메인스트림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데, 그것이 본질인데, 사람들은 그 본질을 벗어나서 비본질에 집착하고 집중합니다. 그러다 보니 언젠가 비본질이 본질을 삼켜버리는 역전 현상이 일어납니다. 오늘 본문에 야곱이 바로 그런 일을 겪고 있습니다.

사명자의 발목을 잡은 연애 감정

야곱은 아브라함, 이삭으로 이어지는 약속의 계보의 중심 인물입니다. 그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사명을 감당하는 데 결혼이 무척 중요합니다. 하지만 결혼이 사명보다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 결혼 문제에 휩싸여서 20년 동안이나 거기에 발목 잡혀 사명의 길을 중단하고야 말았습니다. 역전 현상이 일어난 것입니다. 야곱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혹시 이런 일을 겪고 있지는 않는지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야곱이 밧단아람에 가서 가장 먼저 만난 것은 목자들이었습니다. 자기들끼리 약속하고 자기들끼리 못된 카르텔을 조직하고 있는 목자들을 만났습니다. 목자들은 우물 뚜껑을 덮어두고 양 떼가 다 모이면 뚜껑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목자들을 나무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키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고 확신했기에 용기 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스스로의 힘으로 혼자 우물 뚜껑을 열어버렸습니다. 도대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불가능한 일이었는데 하나님이 그를 살피고 도우셔서 가능해졌습니다. 그 후에 그는 라헬을 만납니다. 자기 신분을 밝히고 라헬은 아버지 라반에게 야곱을 만났다고 전합니다.

"라반이 그의 생질 야곱의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 그를 영접하여 안고 입맞추며 자기 집으로 인도하여 들이니 야곱이 자기의 모든 일을 라반에게 말하매 라반이 이르되 너는 참으로 내 혈육이로다 하였더라 야곱이 한 달을 그와 함께 거주하더니" (창 29:13-14)

이제 야곱이 라반의 집에서 한 달을 거주합니다. 이 한 달이 야곱에게는 어떤 의미였겠습니까? 쉼이 있었습니다. 800km를 쉼 없이 달려왔습니다. 저녁마다 노숙하면서 자기 목숨의 위협을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안전합니다. 먹는 것도 걱정 없습니다. 외삼촌 집에서 한 달을 잘 쉬었습니다.

그런데 이 한 달이 라반에게는 또 다른 의미였습니다. 라반은 이 한 달 동안 야곱이라는 인간을 완벽하게 해부하고 완전하게 파악했습니다. 라반은 오늘 본문에서 처음 등장하는 인물이 아닙니다. 그는 아브라함의 늙은 종 다메섹 엘리에셀이 이삭의 아내를 구하러 왔을 때 등장한 인물입니다. 그는 다메섹 엘리에셀이 가지고 온 은금 패물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자기 여동생 리브가의 몸값을 높일까 생각했습니다.

"리브가의 오라버니와 그의 어머니가 이르되 이 아이로 하여금 며칠 또는 열흘을 우리와 함께 머물게 하라 그 후에 그가 갈 것이니라" (창 24:55)

며칠 혹은 열흘을 머물 이유가 없습니다. 결심이 서고 결단이 되면 그냥 가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오랫동안 붙들어 놓으면 가지고 온 은금 패물을 더 내어 놓을 것만 같으니 계속해서 시간을 지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바로 라반이었습니다. 라반은 자기 여동생이 시집가는 것에 더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여동생을 통해서 물질을 더 얻으려고 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아브라함의 늙은 종은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노련했고 오랫동안 사람을 많이 접해 보았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리브가가 결단했다는 것입니다. 리브가가 결단하고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라반의 계획이 실패한 것입니다. 세월이 한참 지났습니다. 이제 라반은 더 교활해지고 더 노련해졌습니다. 그런 노련한 라반에게 야곱은 한 어린아이 같았고 아주 좋은 먹잇감이었습니다.

사실 라반이 야곱에 대해서 이미 많은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동네 청년들에게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 동네에서 골칫거리가 목자들의 카르텔인데, 멀리서 온 야곱이 그 자리에 오자마자 목자들에게 쓴소리를 했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 것으로 봐서 정의감이 넘치고 의욕이 있는 청년입니다. 그리고 성실합니다. 오다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도 만났습니다. 그는 건장합니다. 힘도 셉니다. 그래서 이 한 달 동안 라반은 야곱을 면밀하게 파악합니다. 어른의 눈에 볼 때 젊은 청년이 그 눈에서 라헬을 사랑하는 것을 느끼지 못했겠습니까? 한 달 동안 이 청년이 자기 딸을 좋아하는 눈빛을 가지고 있는 것, 그런 표시를 하는 것, 그것을 분명히 느끼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계산이 다 끝났습니다.

"라반이 야곱에게 이르되 네가 비록 내 생질이나 어찌 그저 내 일을 하겠느냐 네 품삯을 어떻게 할지 내게 말하라" (창 29:15)

사실 이 말은 아주 평범하게 들리지만 평범하지 않습니다. 일상적이라면, 일반적이라면 외삼촌 입에서 조카에게 이런 말을 할 수가 없는 것 아닙니까? 왜 그렇습니까? 사실 야곱이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외삼촌 라반이 다 들었습니다. 다 알고 있습니다. 이제 한 달이 지났습니다. 그러면 자기 여동생 리브가가 아들을 멀리까지 보내 놓고 얼마나 걱정하는지 기별을 보내고 사람을 보내서 안전하다는 것을 알려줘야 할 것 아닙니까? 한 달 동안 잘 지냈다고 전갈을 넣어 줘야 합니다. 그리고 또 그에게 있어서 에서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 에서의 화가 좀 누그러졌는지, 이제는 야곱을 집으로 돌려보내도 되는지 그것을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지 않겠습니까?

만약 우리가 조카를 이렇게 데리고 있다면, 이런 상황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까? 안전하게 집으로 돌려보내고 그 가정에 이제 평화가 찾아왔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순서인데, 라반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라반은 그저 야곱을 노동력으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농사짓고 여기서 목축하고 여기서 자기 노동자로 세우고 그냥 데리고 있는 것이 그의 목표였습니다.

또 반대로 라반은 두 딸의 아버지 아닙니까? 두 딸이 자기 집에 있습니다. 딸들을 결혼시켜야 합니다. 시집보내야 합니다. 그런데 하란, 밧단아람 지역에 있는 청년들의 상태가 어떻습니까? 목자들의 영적 상태, 목자들의 상황을 우리가 다 보지 않았습니까? 용기가 없는 자들입니다. 자기들끼리 담합하고 게으른 자들입니다. 양을 치다가 그냥 양들을 버려두고 우물가에 모여서 먹고 마시고 게임하고 노는 아이들입니다. 그런 아이들에게 어떻게 두 딸을 맡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