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 하란으로 가서

본문: 창세기 27:42-28:5

동물의 생태를 연구하는 학자의 글에 따르면, 고양이과에 속한 동물들이 서로 다른 개체를 만나면 서열 다툼을 합니다. 그 방법이 흥미롭습니다. 입을 크게 벌리는 것입니다. 고양이를 관찰해 보면 서로 다른 고양이가 만났을 때 입을 크게 벌립니다. 이것은 고양이뿐만 아니라 덩치가 큰 호랑이나 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르는 사람들이 볼 때는 하품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서열을 정하는 중입니다. 입을 크게 벌리면 누구의 턱이 강한지가 드러나고, 누구의 이빨이 더 날카로운지가 보입니다. 서로 입을 크게 벌려 상대의 턱이 더 나가고 이가 더 날카로우면 바로 꼬리를 내리고 서열이 정리됩니다. 그러나 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그때부터 피 터지는 싸움이 시작됩니다.

카멜레온도 흥미롭습니다. 높은 나무의 한 가지 위에 두 마리의 카멜레온이 마주쳤습니다. 누군가가 길을 비켜줘야 두 마리가 싸우다가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때 두 마리가 약속이나 한 듯이 몸을 슬쩍 옆으로 틀어서 자신의 몸통을 상대에게 보여줍니다. 내 몸통을 보고 상대의 몸통을 보고 내 몸이 상대보다 왜소하면 옆으로 길을 비켜 줍니다. 내가 상대보다 몸이 크면 당당하게 어깨 펴고 길을 지나갑니다. 그렇게 서열 정리를 하는 것입니다. 동물들은 이렇게 단순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속성 가운데 동물의 속성도 있고, 거듭나지 않은 교만한 인간은 사람을 보면 서열을 정하고 싶은 본능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동물처럼 입을 벌려서 턱의 강함으로, 이빨의 날카로움으로 서열을 정하지도 않고, 몸집의 크기로 정하지도 않습니다. 다면적이고 복합적입니다. 그래서 간을 봅니다. 질문을 던지면서 "어떤 일을 하십니까?"라고 묻습니다. 그 질문은 그 사람의 직업이 궁금해서라기보다 그 말 속에 다양한 함의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직업을 알면 사회경제적 위치를 가늠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으로 자기 마음속에 서열을 정하는 것입니다. 요즘은 또 다르게 묻습니다. "어디에 사십니까?" 사는 곳을 알면 우리나라가 사는 지역에 따라 나름대로 서열화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는 곳을 물어서 서열을 정하기도 합니다. 속물적인 근성이 묻어나는 질문이지만, 그만큼 사람이 복잡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람이 만든 모든 것은 다면적입니다. 위대한 예술가들, 대가들의 작품도 입체적으로 다면적인 해석이 가능합니다. 인상파의 대가 빈센트 반 고흐가 자기 귀를 스스로 자르고 자기 발로 정신병원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정신병원 창살 너머로 보이는 밤하늘을 그렸습니다. "별이 빛나는 밤", 1889년 작품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작품을 보고 고흐의 정신세계가 불안정하다고 말합니다. 정신병원에 들어가 있는 사람이 밤하늘을 저렇게 정신없이 그렸다고, 이 사람의 말년이 불행했다고 사람들은 이 작품을 평가합니다.

그런데 천문학자들의 평가는 달랐습니다. 천문학자들은 이 그림을 그린 시기가 1889년 6월이라는 점에 주목합니다. 6월 밤하늘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별은 금성, 샛별입니다. 나무 뒤에 보이는 가장 밝게 그린 별이 바로 샛별이고, 달이 환하게 비치고 있습니다. 천문학자들의 분석에 의하면 6월 밤하늘에 달의 위치와 샛별의 위치가 너무 정확하게 그려졌는데, 이것을 정신병자가 그렸다고 말할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적어도 고흐는 정신병자는 아니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유가 어떻게 되었건, 진실이 무엇이건 고흐에게 물어봐야 하겠지만, 하나의 작품을 보는 다양한 관점이 있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이것은 미술작품뿐만 아니라 음악도, 문학도 다양한 관점으로 다면적으로 분석하고 바라보고 감상할 수 있습니다.

하물며 우리 인간의 삶이야 더 말해서 무엇하겠습니까? 우리 인간의 삶은 한 가지 눈으로, 한 가지 시각으로만 재단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인생에 일어나는 수많은 갖가지 사건들이 있습니다. 나에게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건들이 있는데, 우리는 일반적으로 내 관점으로만 해석합니다. "이건 나에게는 불행한 일이다", "이건 나에게는 행복하고 즐거운 일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타인의 관점도 한번 살펴봐야 합니다. 내 친구는 나에게 일어난 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내 부모는, 자녀는, 형제는, 이웃은, 가족은, 나와 관계에 있는 사람은, 가까운 사이에 있는 사람은 어떻게 보는지 다면적, 입체적으로 살펴봐야 자기만의 오류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여기서 가장 중요한 관점이 필요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시각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나에게 일어나는 이 일을 어떻게 보고 계시는가? 하나님의 관점이 빠진다면, 우리의 관점만 가지고 있다면 편파적이고 지엽적인 인생을 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피신의 상황, 훈련의 시작

오늘 우리가 읽은 하나님 말씀은 야곱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보면 야곱 이야기의 변두리 사건을 다룬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을 야곱의 관점에서만 보지 않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 사건을 보면 야곱 이야기에 중대한 기로가 되고 분기점이 되는 사건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내 인생을 보는 하나님의 관점을 함께 찾고 배우기를 바랍니다.

리브가는 걱정이 됩니다. 에서가 야곱을 죽이겠다고 길길이 날뛰고 있습니다. 그런데 리브가는 에서의 이 말이 그저 화가 나서 욱해서 해보는 말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에서가 동생을 죽일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리브가가 아들 야곱을 불러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 아들아 내 말을 따라 일어나 하란으로 가서 내 오라버니 라반에게로 피신하여 네 형의 노가 풀리기까지 몇 날 동안 그와 함께 거주하라" (창 27:43-44)

에서가 동생 야곱을 죽이겠다고 하니까 이 말이 리브가에게는 큰 위협으로 들렸습니다. 그래서 야곱에게 신신당부합니다. 지금 이곳을 떠나서 밧단아람, 네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피신해서 며칠 동안만 기다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의 진심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네 형의 분노가 풀려 네가 자기에게 행한 것을 잊어버리거든 내가 곧 사람을 보내어 너를 거기서 불러오리라 어찌 하루에 너희 둘을 잃으랴" (창 27:45)

"어찌 하루에 너희 둘을 잃으랴", 이 말이 리브가의 마음속에 있는 깊은 진심이었습니다. 리브가는 가인과 아벨의 사건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가인의 마음속에 동생을 죽이고 싶은 살해 충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그의 부모 아담과 하와는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내버려 두었습니다. 하나님의 개입도 가인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결국 살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아벨이 죽었습니다. 아벨이 죽어서 부모 곁을 떠났습니다. 가인도 하나님께서 그를 붙잡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지만, 죄책감을 견디지 못하고 하나님 앞을 떠나 에덴 동쪽 놋 땅으로 가서 성을 쌓고 부모와 절연하고 말았습니다. 하루아침에 자녀들을 한꺼번에 잃고 만 것입니다.

이것을 리브가가 잘 알고 있습니다. 내가 여기서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으면 형은 동생을 죽일 것이고, 동생은 살해당할 것이고, 형은 그 죄책감에 가인처럼 길을 떠날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여기에 적극적으로 개입합니다. 이것이 리브가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리브가가 잘못 생각한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몇 날만 지나면, 형의 노가 풀리기까지 며칠만 있으면 내가 너를 다시 불러오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몇 날'이라는 것이 20년이나 지나고 말았습니다. 밧단아람은 바로 옆 동네가 아닙니다. 멀고 먼 곳입니다. 이삭이 리브가를 데려올 때도 이삭이 직접 가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의 늙은 종 다메섹 엘리에셀이 가서 리브가를 데려올 정도로 먼 곳입니다. 그런데 그 정도로 멀리 가줘야, 거기서 라반의 보호 아래 있어야 에서가 야곱을 해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곳으로 아들을 멀리 피난시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삭과 리브가와 야곱의 상황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 세 사람의 상황은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아들이 죽고, 가만히 있으면 내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떠나야 합니다. 불가피한 상황입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어쩔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이삭과 리브가와 야곱의 입장에서 보면 피신입니다. 살기 위해서 도망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관점의 전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