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하 특강 10 - 광야에서 (3) / 삼상 27-31장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붙잡히리니 블레셋 사람들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좋으리로다 사울이 이스라엘 온 영토 내에서 다시 나를 찾다가 단념하리니 내가 그의 손에서 벗어나리라 하고 다윗이 일어나 함께 있는 사람 육백 명과 더불어 가드 왕 마옥의 아들 아기스에게로 건너가니라" (삼상 27:1-2)


다윗의 일생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여러 번 언급했듯이, 다윗 생애의 최고의 자리, 하이라이트의 자리는 바로 광야 생활입니다. 사실 광야가 어떻게 우리 인생의 하이라이트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내용적으로, 결과적으로 보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이 믿음의 사람들 인생의 최고의 순간이라고 한다면, 다윗의 인생에서는 나중에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예루살렘 왕궁에 거하고 거기서 밧세바와의 죄를 짓는 것보다, 광야에서 하나님과 함께 거하던 인생이 다윗 인생의 최고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광야를 그저 우리가 피해야만 할 곳으로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광야가 우리에게 최고의 자리가 될 수 있겠구나 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광야이기만 하면 그 자리가 최고의 자리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광야 1, 2, 3을 살펴보는데, 오늘 세 번째 광야에서는 다윗이 광야에서 죄 짓는 자리를 봅니다. 사실 광야에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살지 않으면 넘어지기 딱 좋습니다. 여러 가지 힘든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다윗이 광야에서 왜 실패했는지, 그 실패의 원인을 알면 우리는 광야 생활을 어떻게 해야 성공할 수 있는지 함께 볼 수 있습니다.


1. 가드 왕 아기스에게 가다

1-1. 생각에 빠진 다윗

사울을 피해 기약 없는 방랑 생활을 하던 다윗이 어떤 결정을 내립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본 다윗은 일생의 아주 기념비적인 두 가지 결단을 합니다. 사울을 살려주지 않습니까? 사울을 자기 손으로 죽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울을 두 번이나 살려주었습니다. 이것은 아주 위대한 사건이었습니다. 사무엘이 죽은 그 이후, 또 그 이전 해서 사무엘의 죽음을 분기점으로 삼으면, 전에도 한 번 살려주고 후에도 한 번 살려주고 두 번이나 사울을 살렸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사울은 자기의 목숨이 사실 다윗의 손에 달려 있다가 겨우 살아났습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할 것 아닙니까? 그리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등골이 서늘해질 것 아닙니까? 아무리 사울이라 하더라도 이제 그쯤 되면 좀 쉬어야 합니다. 이제 자기 왕궁에 돌아가서 생각도 좀 해보고, 다시 전열을 좀 가다듬고, 들판에서 야영하다가 다윗과 아비새에게 뚫려 버렸으니까 자기 군대의 대형도 한번 점검해보고, 이런 휴지기가 좀 필요한 것입니다.

자 그러면 사울이 다윗을 쫓아오다가 잠깐 쉬러 간 사이에, 이제 전열을 좀 정비하고 자기도 좀 돌아보는 그 사이에 다윗은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요? 탈색하기에는 좀 살 만합니다. 이제 한숨 돌릴 만합니다. 쉴 새 없이 몰아치듯이 사울이 지속적으로 계속해서 몰아치고 다윗을 잡아 죽이려고 항상 몰아치다가, 이제 조금 숨을 좀 돌릴 여유가 생긴 것입니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이 사람이라는 존재가 아주 영악하고 사악해서, 시간이 있으면 무엇을 합니까? 딴생각을 합니다. 시간이 있으면 기도하고 말씀 보고 주를 찬양하면 참 좋은데, 시간이 있으니까 딴짓을 합니다. 지금 다윗이 딱 그 모습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27장 1절,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성경 읽을 때 이 '생각하다'라는 말을 이렇게 그냥 지나가면 안 됩니다. 이 '생각하다'라는 말을 지금 히브리어에서 어떻게 했느냐 하면, '아마르(אָמַר)'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원래 '아마르'는 '말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에 말하다' 이렇게 되니까, 자기 마음에 말하는 게 무엇입니까? 혼잣말 하는 것 아닙니까? 스스로에게 말하는 것, 이것을 '생각하다'라는 단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래의 다윗은 자기 스스로에게 말하지 않고 항상 누구에게 말해 왔습니까? 하나님께 말해 왔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기도였습니다. 다윗은 항상 하나님께 말하고, 하나님께 아뢰고, 하나님께 자기 속을 털어놓고 항상 그랬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있으니까, 사울도 이제 안 쫓아오고 여유가 좀 생기니까, 나도 좀 스스로 사색도 좀 하고 생각도 좀 하고, 자기 스스로 자기도 좀 돌아보는 시간이 좀 필요했던 것입니다.

필요하지요. 물론 보통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철학자들이 있지 않습니까? 저도 철학과를 나왔는데, 저희 선배들이 항상 저한테 한 말이 있습니다. 돈만 있으면 딱 좋은 학문이고, 돈 없으면 굶어 죽기 딱 좋다고 그랬습니다.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철학자들은 그래도 좀 먹고 살 만한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니까 생각하고 사색하는 것이지요.

다윗이 시간이 있고 여유가 있으니까 혼자 생각하다가 어디까지 가버렸느냐 하면, 보십시오.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붙잡히리니." 이런 생각을 왜 합니까? 이때까지 하나님이 지켜주시고 하나님이 돌봐주셔서 사울의 손에 붙잡히기는커녕 사울을 죽일 기회를 두 번이나 가졌는데, 자기 손으로 사울을 풀어주고, 사울에게 전능하신 하나님을 나타내고, 사울의 군대를 떨게 만들었는데, 시간이 많이 있으니까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런 생각을, 어이없지 않습니까?

거기서 또 좀 더 나아갑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좋으리로다." 미치겠습니다. 이제 사울의 손에 사로잡힐 것 같고, 이제는 우리가 블레셋 사람의 땅에 들어가서 피하는 게 좋겠다니요! 그러면 그냥 거기서 생각이 막 그런 생각이 들면, 그때라도 생각을 딱 멈추고 "하나님, 이런 생각이 선한 생각입니까, 나쁜 생각입니까? 그렇게 해도 됩니까, 안 됩니까?" 물어봐야 되지 않습니까?

다윗이 정말 잘한 게 하나님께 묻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께 묻는 게 다윗의 시그니처인데, 한 번 더 묻지도 않고 그냥 결정해 버립니다. 2절에 보니까 "다윗이 일어나 함께 있는 사람 육백 명과 더불어 가드 왕 마옥의 아들 아기스에게로 건너가니라." 21장에서 한 번 갔었습니다. 아기스가 죽이라 그랬지요. 그래서 미친 척하고 침을 질질 흘리면서 겨우 위기를 빠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나서 지은 시가 시편 34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아기스에게 간 것은 그때와 지금이 굉장히 다릅니다. 상황이 왜 다르냐 하면, 지금 아기스는 다윗과 사울의 상황을 잘 알고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항상 이스라엘을 예의주시하고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에서 돌아가는 상황을 다 알고 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잡아 죽이려고 하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다윗이 굉장히 거물급 인사가 된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혼자 오는 게 아닙니다. 육백 명을 거느리고 함께 정치적인 망명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드 왕 아기스가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거대한, 지금 거물급 인사가 된 다윗을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지요. 그렇게 해서 지금 가버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