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을 중심에 모시고 (막 2:18-22)

신앙생활을 처음 하시는 분들은 주변에서 성경을 꼭 읽어보라는 권면을 많이 받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처음 읽으면 적지 않은 어려움에 부딪힙니다. 성경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에게도 성경을 처음 읽는 분들이 이런저런 어려움을 호소하시며 질문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중에 공통적인 질문 하나가 있습니다. 복음서는 왜 네 권이나 되어서 똑같은 사건이 여기에도 저기에도 기록되어 있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도 비슷비슷하고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도 거의 대동소이한데 왜 똑같은 내용들이 여기저기 기록되어 있느냐는 것입니다. 저는 그 질문을 받으면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복음서가 네 권인 것이 우리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이라고 말입니다.

1. 관점의 차이와 하나님의 관점

1-1. 복음서의 다양한 관점

예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복음서에 똑같이 기록되어 있는 것 중 하나가 오병이어 사건입니다. 마태와 마가와 누가는 오병이어 사건을 거의 같은 관점으로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조금 다르게 보았습니다. 요한은 그 사건 중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한 어린아이의 믿음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아이가 가지고 나온 도시락을 부각시켜서 기록했습니다. 한 아이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져다가 주님께 드렸습니다. 마태나 마가나 누가는 그것을 별로 중요하게 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주님이 축사하신 것이 훨씬 더 크게 보였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만약 그 어린아이의 믿음과 헌신이 없었더라면 과연 오병이어가 가능했겠는가 하는 눈으로 그 사건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이 기록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오병이어 사건의 입체적인 전말을 아마 지금도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네 복음서가 다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입체적으로 그 사건을 이곳저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 한 가지 사건을 열두 명의 제자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보는 입장에 따라서 어떤 이는 이것을 더 강조하고 어떤 이는 저것을 더 강조하는 것이 사람의 입장과 관점입니다. 우리 일상에서도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 어느 한 부부가 드라마를 보고 있다고 합시다. 드라마에서 여자 주인공이 화가 나서 남자 주인공 뺨을 때렸습니다. 남편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 여자가 때릴 일도 아닌데 뭐 저런 거 가지고 저렇게까지 화를 내나. 그런데 아내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왜 한 대밖에 안 때리지. 한 대로는 안 되는데, 두 대 세 대를 더 때려야 되는데. 분이 풀리지 않습니다. 똑같은 드라마를 보는데 남편과 아내가 보는 관점이 이토록 다른 것입니다.

교회 생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한 가지 사건 한 가지 일을 보는데 목사가 보는 관점이 다르고 성도들이 보는 관점이 다릅니다. 직분에 따라서도 장로님들, 집사님들, 권사님들이 보는 관점이 저마다 다릅니다. 이건 우리가 인정하고 당연히 그렇게 된다고 생각해야 하는 관점의 차이입니다.

1-2. 하나님의 마음 품기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꼭 기억하고 붙들어야 할 사실은 우리가 언제든지 내가 가진 생각과 관점을 내려놓아야 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관점, 하나님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시각과 관점이 어떠하든지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다 내려놓고 지금 이 상황에서 하나님이 가장 바라고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것을 기억하고 붙드는 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 말씀에는 주님을 중심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고귀하고 값진 것인지 우리에게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의 집에서 잔치를 하고 계십니다. 세관에 앉아 있던 세리 마태를 주님이 부르셨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마태가 응답했습니다. 그와 함께 지냈던 세리들, 그와 함께 어울렸던 창기들이 함께 모여서 잔치를 벌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찬물을 끼얹는 말을 합니다. 아주 날선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18절 말씀을 보십시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2. 금식의 참된 의미

2-1. 혼인잔치의 기쁨

이 사람이 와서 던진 것은 금식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금식에 대한 규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함께 금식하는 날은 일 년에 한 번 대속죄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경건하다고 자부하는 유대인들, 신앙생활을 좀 한다 하는 유대인들은 일주일에 두 번을 금식했습니다. 그것은 월요일과 목요일이었습니다. 그중 한 날, 유대인들이 다 금식하는 날에 왜 당신은 잔칫집에서 이렇게 먹고 마시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질문을 받은 주님에게 이것은 매우 곤란한 질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경건하게 금식하는데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은 잔칫자리에서 먹고 있으니 당신은 경건하지 않다는 지적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어떻게 주님께서 해명하시겠습니까? 또한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던 세례 요한의 제자는 예수님과 사실 같은 편입니다. 같은 비전과 같은 마음을 공유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까지 금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문제 삼은 사람이 당신은 지금도 금식하고 있지 않으니 경건하지 않은 사람임에 틀림없다고 몰아붙이는 것입니다.

19절과 20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주님은 두 가지를 규정하셨습니다. 첫째, 지금이 잔칫집 곧 혼인잔칫집이다. 둘째, 내가 이 잔칫집의 신랑이다. 이렇게 규정하신 이 말씀은 정말 옳은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이 잔치는 누구를 위한 잔치입니까? 마태를 위한 잔치 아닙니까? 세리 마태가 지금까지 세관에 앉아서 죽은 자의 상태로 있었습니다. 그는 돈의 맛을 알았고 권력을 좇아다녔고 돈이 주는 쾌락과 육체적 쾌락에 탐닉하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을 섬기던 사람이었습니다. 맘몬(μαμωνᾶς)을 숭배하고 돈을 섬기던 사람이었습니다. 권력을 숭배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의 부름에 응답했습니다. 이제 나는 세상을 따르지 않겠습니다. 주님을 따라가겠습니다. 결단했습니다. 영적으로 신랑되신 예수님과 혼인하는 혼인 서약을 한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천국에서 가장 기뻐하실 일입니다. 이 땅에 죽어가던 한 죄인이 하나님을 믿겠다 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하늘에서도 천국 잔치가 열리고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지금 죽은 자의 상태에 앉아 있던 레위 마태가 나를 따르고 하나님의 진정한 자녀가 되겠다고 결단했다. 그래서 이 자리가 혼인잔치처럼 잔치를 벌이고 있는데 이것이 뭐가 문제가 되느냐. 이날이 대속죄일이든 이날이 월요일이든 이날이 목요일이든 그게 무슨 상관이냐. 죽어가는 영혼이 구원받는 자리, 이 복되고 행복한 자리에 포도주를 함께 마시고 식사를 나누는 것이 무엇이 문제라는 말이냐. 왜 이런 것을 가지고 문제 삼느냐 하시는 말씀입니다.

지금은 금식해야 될 때가 아니라 죽어가는 영혼이 구원받았으니 함께 먹고 즐기고 잔치하고 노래 불러야 할 때다. 정말 금식할 때가 오는데, 그때는 신랑 된 내가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길을 올라가고 너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릴 날이 올 텐데, 그때가 금식해야 될 때다.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2-2. 자기만족과 자기과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