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드는作 사람家으로서 이여로를 소개하는 페이지. 이여로는 지원자격을 요구하지 않는 블로그, 아티스트북, 해적번역 등을 통해 글과 책을 만들기 시작했다. 각자의 만들기 속에서 가치나 인정이나 행동의 체계가 정립되는 과정을 ‘아마추어리즘’이라 부르며 예술에 한정되지 않는 모든 만들기에 귀를 기울인다. 출판사 기획:1을 운영하며 공저, 협업 위주의 만들기를 지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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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ide> 🌍 「**아마추어의 기원, 아마추어로서 우리」: 《릿터 제40호》, 민음사, 2023.**

전문성이 정상성의 주된 축을 이루며 사회 제도 전반의 기준으로 작동하는 오늘날의 사회를 전문가주의 사회라고 부를 법하다. 모든 사람이 이러한 전문성을 요구받고 또 준비하면서, 일부만이 가능한 그 자격을 위해 몰두하고 있다. 성공한 사람들은 마음껏 기뻐하고, 사회의 구성원이 되며, 실패한 사람들은 말없이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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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ide> 🌍 다시 보아주는 사람들: 서울시립미술관 모두의 연구실 세마코랄, 2023.

리뷰함으로써 동료가 되는 건 아닐까? 하지만 이 말을 제도에 의해서 전문화된 리뷰어, 즉 평론가나 연구자 등이 창작자의 동료가 된다는 뜻으로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때 이 말은 제도의 경계를 환기하기보다 제도 내부의 사회화에 더 가깝게 작동한다. 그렇기에 ‘여타의 지면에 게시되는 분석적, 인상적 글쓰기’로 실체화되어 있는 ‘리뷰’ 또한 동시에 변화를 요구 받는다. ‘다시–본다(re–view)’는 것, 나는 이 행위로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 그리고 같이 보아 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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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ide> 🌍 아마추어리즘의 사회, 그리고 예술」 : 『문학과사회 하이픈지 문학–사회』 2021년 가을

반대로 보편성을 직접 표상하지 않는 아주 작은 크기의 관점과 말하기가 갖게 되는 고유한 힘이 있다. 그것은 표상의 측면에서 작지만 영향의 측면에서 대등할 수 있다. 따라서 나는 어떤 말이 아니라 어떤 말들을 만들 수 있는, 문화를 생산하고 우리 자신을 재생산할 수 있는 행위의 최소 단위를 조명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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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ide> 👀 「기록 없는 사진」**, 김상하·배자은 2인전 《나프탈렌캔디》, 00의 00, 23년 9월 13일~24일.**

이 사진들을 누구의 자리에서 볼지 오래 고민했다. 나는 작가의 어머니의 관점에서 보기를 선택했다. 이 관점은 나에게 가장 익숙한 것이다. 이 사진을 촬영했거나 촬영의 대상이 되었던 사람, 전문가용 카메라를 다뤄본 일 없고, 일회용 필름 카메라나 보급화된 디지털(스마트폰) 카메라로만 사진을 찍어본 사람의 관점. 이것은 사진과의 관계에서 내가 내 마음대로 접근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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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ide> 👀 「**기억술로서 예술: 사근으로부터」, 다이 개인전, 온수공간, 23.07.12~30.**

그래서 예술은 나에게 그 시작부터 기억술로서 의미를 가졌다. 미술관에 설치된 작품, 단행본으로 인쇄된 소설, 무대 위의 공연만을 뜻하는 게 아니다. 급하게 적어 나간 일기, 흥얼거리는 콧노래, 목소리의 고저, 끝없이 보고 듣기를 강제하는 몸들… 아직 내 안에서만 발생하고 있는 것들을 나는 ‘최소 예술’이라고 이름하며, 전문 예술을 관찰하는 도구로서 종종 거기에서 기억술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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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ide> 👀 **「미적 주체로서 관객: 감각적 사고를 통한 지적 해방」, 전시 《우연을 기대》(기획 조은비, 작가 신민·시린 세노·이민지·장서영·노예주), d/p(서울 종로구 낙원상가 옥상), 22년 10월 18일~11월 19일.**

《우연을 기대》는 ****팬데믹 이전으로, 기후위기 이전으로, 온갖 문제들 이전으로 '복구 가능하다'는 익숙한 욕망 대신 아무 것도 되살아나지 않는 세상에서 우연히, 함께 살아가기를 말합니다. 개인이 속수무책으로 맞닥뜨리는 현재, 그러한 개인들의 곁에서 어떤 잠재성, 주체성을 보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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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ide> 👀 이유림 개인전 《불안이 낳은 껍질》의 서문

《불안이 낳은 껍질》은 보기를 부정하기보다 보기에 엄격해지려고 한다. 보기와 판단이 동일시되기 이전의 틈새, 망상과 실재가 정당하게 뒤섞이는 겹의 공간이 우리가 갈 곳이다. 우리는 그 길에서 보기의 선택들을 마주할 것이고, 보기의 의식이 활성화시키는 빛들을 남겨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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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ide> 👀 희곡 읽기의 실패와 경로」, 서울연극센터 재개관 기획프로그램 연계 비평, 웹진 연극인 제234호, 2023.

어느 교수가 문학을 “어디에 쓰여도 똑같은 것”으로 정의했다던 기억이 난다. 이를 문자 텍스트에 대한 순수주의적 태도, 근본주의적 태도라고 부를법하다. 나는 반대로 ‘그것은 다르다’고 느껴왔다. 문자는 어디에 쓰이고 어떻게 쓰이고 어떻게 불리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나는 그 다름을 민감하게 느끼면서 단위가 마련되고, 미련해도 좋으니 이어가면 각자의 언어가 발생한다고 말해왔다. 내가 느낀 그 다름 역시 매체이론이나 기호학 따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왜 이렇게 안/잘 읽히냐’는 소박한 감상에서 시작한 것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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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ide> 👀 「이미지의 기술, 보기의 기술」, 김아름·옥세영 2인전, 〈쿠션이 프레임 형태로 된다면 ok입니다〉, 갤러리 175, 22/11/22—12/03.

물론 이 원통을 돌아가게 만든 것은, 스톱모션을 만들기 위해 찍어 두었던 무수한 낱개의 사진들과 이것을 편집하는 컴퓨터 프로그램, 이것들을 터치패드나 마우스로 조작하는 옥세영의 손이다. 하지만 마니차의 사례에서 보았듯, 원통을 단순히 돌아가게 만드는 것과 그것을 작동시키는 것은 다르다. 작동한다. 이 말은 이전에 단순히 잠재적 상태에 있었던 것을 바로 이러한 상태로 존재케 함을 의미한다. 마니차의 원통이 사람들의 이미지 속에서 스스로 불경을 외우게 작동되었듯이, 나는 이 원통이 어떻게 스스로가 제시하는 이미지 속에서 움직이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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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ide> 👀 틀림없이 사람들은 행동의 회로에서 새로운 규정들이 출현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조희수 솔로 스크리닝, 〈The Divers〉, 2021.

부르디외는 “어떤 사람이 기술적 역량을 취득하는 성향을 갖추기 위해서는, 그를 역량 있는 사람으로 지목하기만 하면 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해보자. 뛰게 하기 위해서는 라인을 그리면 된다고. 다이빙 하기 위해서는 하늘에서 내려 찍으면 된다고. 이미지의 유통 방식은 아주 잠시만, 그냥 정면을 응시하는데 사용되면 그만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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