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서 있는 토대가 붕괴하면서 예술 전반에 두 시선이 도드라진다. 하나는 이미 소멸했거나 소멸하고 있는 과거를 바라보는 시선이고 다른 하나는 아직 오지 않아 공백인 미래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과거는 고통의 비명을 지르고 미래는 가능성의 지평인 자신을 과시하며 이목을 끈다. 이를 보고 있으면, 새로운 세계는 시급히 구성되어야 할 것만 같다. 이 글은 한국의 현대미술 수용 및 전개사와 유운성 평론가의 동시대 예술 진단을 통해 두 시선의 실체를 확인하고 그것에서 벗어나는 한 가능성을 간략히 제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1930년 말에는 김환기, 오지호, 고유섭 등에 의해 ‘현대‘와 ’현대미술‘에 대한 입장들이 오갔으나, 폐허가 된 전후에는 간절히 염원 될 뿐이었다.[1] 공간적으로 고립되고 시간상으로 후진한 상황에서 현대란, ‘비약’을 통해서라도 성취되어야만 하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구가 밟은 일련의 역사 과정 없이 그들이 남긴 것들을 모방하며 현대미술을 시작하게 되었고 1950년대 서구 현대성의 기반이 모던(modern)에서 전쟁의 상흔으로 발생한 정신현상들로 옮겨가면서 한국의 현대(contemporary)미술은 갑작스레 정당화되었다.
관련 담론의 핵심 인물 중 한 명이었던 김영주는 근대가 부재한 우리에게 현대성의 근거는 근대일 수 없고 정신현상이며, “최근 10여 년 동안 경험한 정신현상에 초점을 두고 과거에 거슬러 올라가거나 미지의 세계에로”[2] 향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이후 앵포르멜, 추상의 확산과 추상 이후의 구상 등 현대미술의 외양이 새롭게 전개되면서도 주요 담론은 비슷한 논쟁과 결론을 보였다. ‘그 내용과 양식이 우리의 현대냐?’하는 질문이 반복되었고, ‘6.25 전쟁이 우리의 정신을 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유럽인과 비슷한 상태로 만들어 ‘기묘한 동시성’을 가지게 되었다’라는 결론이 공유되었다. 따라서 우리에게 현대미술이란 자신의 정신현상을 바탕으로 한 이러저러한 작업과 작품들이라고 거칠게 표상할 수 있고, 이는 동시대 미술에도 여전히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 확인하기 위하여 동시대 미술 전반을 훌륭히 포착한 유운성의 『물듦』에 수록된 부록, <아카이브, 혹은 자기기술 시대의 미학>의 주장들을 함께 보자. (이 부록은 문화산업 바깥의 예술 즉, 제도적 지원을 통해 연명하는 예술들에 관한 서술임을 밝혀둔다.)
“오늘날 미학을 대체한 것은 아카이브이고, 내러티브를 대체한 것은 링크이며, 픽션을 대체한 것은 자기기술(self-description) (이다.) ・・・ 미학이 그 근거를 상실한 지는 오래되었고, 예술 작품에 대한 평가란 그것을 어떤 의미작용의 네트워크에 두고 고찰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 자기기술이 픽션을 대체해버린 시대에 네러티브란 자기로부터 출발해 링크를 통해 네트워크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가리키는 용어(이고) 아카이브란 링크를 통해 자기를 기술(description)하는 기술(technology)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3]
이를 이렇게 요약해 보자. ‘동시대 미술에서 작동하는 내러티브는 자기기술을 보조하는 링크와 링크를 보조하는 아카이브에 의해 구성된다.’ 이는 텍스트가 범람하는 전시장, 연구자와의 협업, 수많은 전시 연계 행사(강연 등), 작업에 참고한(할) 텍스트들이 정리된 아카이브 사이트 등 동시대 미술의 흔한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이는 미술이 세계를 새롭게 감각하는 살아있는 육체가 아니라 과거의 지식으로 그 존재가치를 부여받는 유물(遺物)에 가까워졌음을 뜻한다. 자기로부터 출발하였으나, 대부분 그 자체로 표현해내거나 이야기되지 못하고, 자신이 링크한 것들이 자신의 존재 의미를 주무른다. 작가와 작품은 자신의 정신현상을 바탕으로 링크된 것들을 가리키는 인덱스(index)에 머무른다.
이 틀 아래서 동시대 미술의 두 축을 가늠해 볼 수 있다. 가능성의 지평인 미래에 시선을 두는 경우, 작가는 미래를 아무것도 확정되지 않은 시간으로 여기고 생태학, (생명)과학, 과학기술 등과 주로 링크하며 이미 구성된 일련의 네트워크로 들어간다. 작품은 그 안에서 근거와 의미를 얻고, 작가는 그 위에서 창의성을 발휘해 형태를 만든다. 아포칼립스, 기후 위기 등과 관련된 작업을 떠올릴 수 있다. 과거에 시선을 두는 경우, 작가는 본인과 관련된 사적 과거를 재구성 또는 현재화하는 과정에서 정신분석, 페미니즘, 종교 등과 주로 링크하며 이미 구성된 일련의 네트워크로 들어간다. 작품은 그 안에서 근거와 의미를 얻고, 작가는 그 위에서 과거를 배치한다. 개인 또는 특정 공동체, 페미니즘과 관련된 작업을 떠올릴 수 있다. 대부분의 동시대 미술이 이 두 축 사이에서 진동한다. 비슷한 이론과 의미가 먼저 자리하고, 작가는 자신의 위치에서 역량껏 그것을 가리킨다.
이는 작품의 의미가 바깥에 의해 미리 구성되고, 그 바깥에 개입할 또 다른 바깥을 잘 차단해야 작동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기대를 모은 축구 경기의 승패가 바깥의 돈 놀음에 의해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사실이 발각된 상황을 생각해 보자. 승부조작은 내부 구성원 간 모종의 공모를 전제한다. 이 사실이 외부에 발각된다면, 경기가 평소와 같이 진행될지라도, 관객은 몰입할 수 없고 거기서 어떤 새로움도 경험할 수 없다. 이런 상황이 문제시되지 않고 반복된다면, 점차 관객은 사라지고 선수는 축구가 아닌 그들과 잘 공모하는 법을 연마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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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정훈, 「우리에게 “현대미술”은 무엇이었나?」, 『한국근현대미술사학』, vol. 46, no. - (2023): 59-88. [2] 위의 글. 69. [3] 유운성, 『물듦』 (미디어버스, 2025), 102, 103, 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