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오빌로 각하에게 (눅 1:1-4)

알브레히트 뒤러라는 독일의 유명한 화가가 있습니다. 이분은 1471년에 태어나 1528년까지 살았던 분으로, 16세기 독일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입니다. 이분은 위대한 작품들을 여러 점 남겼는데, 그중에 우리가 잘 아는 작품도 있습니다. 1508년 작품인 "기도하는 손"이라는 제목의 작품입니다. 또한 1489년에 "방앗간"이라는 작품도 남겼는데, 이것은 일견 편안한 한 폭의 풍경화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풍경화가 맞습니다. 그런데 이분의 풍경화가 특별한 이유는 여기에 사람이 하나도 등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분 이전의 풍경화는 사람이 주인공이었습니다. 그런데 순수 풍경화, 즉 사람으로부터 독립된 풍경화는 뒤러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알브레히트 뒤러는 위대한 화가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이분은 화가로도 위대했지만, 사회 개혁가로도 특별했던 분입니다. 이분은 평생 동안 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단 한 권의 책도 라틴어로 쓴 적이 없었습니다. 라틴어를 몰라서가 아니라 일부러 쓰지 않은 것입니다. 그 당시 예술가들과 건축가들은 자기들만의 조직이 있었습니다. 이른바 길드라고 하는 조직인데, 그 조직은 지식을 공유하면서도 자기들 공동체에 들어오지 않으면 세상 밖으로 지식을 흘려보내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철저한 도제 방식으로 가르쳤습니다. 예술, 미술, 수학, 건축 등의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그 자리에 모여서 함께 공부하고 함께 가르치되, 지식을 외부와는 공유하지 않았습니다.

알브레히트 뒤러는 이런 방식에 철저하게 반대했습니다. 그가 가진 미술의 기본과 건축의 이론 등을 라틴어가 아닌 모국어인 독일어를 사용해서 널리 알렸습니다. 누구든지 마음만 먹으면, 배우려는 의지만 있으면 충분히 공부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특별한 사회 개혁가였습니다. 세상이 나로 인해서 조금 더 좋아지기를, 내가 가진 지식으로 세상을 섬기기를 꿈꿨던 사람이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보면 이분이 활동했던 시기와 마르틴 루터의 시기가 정확하게 겹칩니다. 종교 개혁이 1517년에 일어났기 때문에, 종교 개혁을 이끈 마르틴 루터와 그의 생애가 아주 겹칩니다. 마르틴 루터는 그 당시 사제들이 라틴어 성경을 읽는 것에 반대했습니다. 글을 모르는 농민들이 교회에 오는데 예배가 라틴어로 진행됩니다. 성경도 라틴어로 읽습니다.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읽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루터가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지 않았습니까? 누구든지 마음만 먹으면 성경을 읽고 배우고 암송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같은 맥락으로 뒤러 역시 그러했습니다. 두 사람은 만난 적은 없었지만, 알브레히트 뒤러는 루터의 재정적인 든든한 후원자였습니다. 마르틴 루터를 통해서 하나님의 복음이 세상으로 흘러나왔고, 뒤러를 통해서 지식이 세상으로 흘러나왔습니다.

여러분, 복음이 어떤 것입니까? 복음은 교회 안에 갇혀 있어서는 안 됩니다. 복음은 흘러나와야 합니다. 몇몇 사람이 복음을 독점하고 몇몇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독점한다면, 그것은 건강한 교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말씀을 흘려보내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교회가 독점하고 그 말씀을 그들만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영혼 구원이 가능하겠습니까? 주변에 믿지 않는 사람들, 불신자들, 아직까지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 자들에게 십자가 복음을 전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 의미에서 오늘부터 우리가 살펴볼 누가복음의 저자인 누가는 아주 훌륭한 분입니다. 그분은 자신이 만난 그리스도를 상세하게 기록했습니다. 누가복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오심과 사역과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을 기록했고, 사도행전을 통해서 성령이 이 땅에 오신 것, 성령의 역사, 교회가 생겨난 것, 사도 바울을 통해서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된 것을 상세하게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흘려보내 주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한 사람 데오빌로에게 전했는데, 오늘 이 순간 수많은 사람들이 그가 전한 복음을 듣고 구원받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분의 사역을 통해서 나는 어떤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가, 이 시대 교회는 과연 어떠해야 하는지를 함께 살피고 묵상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복음은 사실입니다

1절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어떤 소설가가 자신의 소설을 쓴다면, 가장 고민하는 지점이 첫머리입니다. 어떤 주제를 전하려고 하는데 첫머리의 첫 단어를 무엇으로 쓸까? 어떤 주제를 담아내야 하는데 첫 문장을 어떻게 쓸까? 얼마나 고민되겠습니까? 첫 문장을 썼다가 지웠다가, 지웠다가 썼다가를 수백 번 수천 번 반복하는 소설가도 있습니다.

복음서를 기록하는 누가에게 있어서 자신의 복음서 첫 장 첫 절입니다. 당연히 고심하지 않았겠습니까? 우리는 그냥 읽지만, 누가는 이 누가복음을 기록할 때 첫 장 첫 절을 상당히 고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기도하고 고심한 끝에 적어낸 이 말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우리는 여기서 '사실'이라는 말에 주목합니다.

무엇이 사실이라는 말입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 예수님이 이 땅에서 행하신 모든 일, 예수님께서 고난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모든 일이 하나도 거짓 없는 사실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복음서의 첫머리에 '사실'이라고 천명하면서, 내가 전한 이 복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거짓이 없다고 선언합니다. 나는 하나도 덧대거나 덧칠하거나 보태거나 한 것이 없다는 것을 누가가 선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통해서 아주 중요한 교훈을 얻습니다.

1-1. 복음에 덧칠할 필요 없습니다

복음이 사실이기 때문에 우리는 복음에 덧칠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꾸밀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스에 가보면 여러 신들을 섬기는 신전이 있습니다. 얼마나 화려한지 모릅니다. 얼마나 잘 지었는지 모릅니다. 어떻게 그 시절에 이렇게 거대하고 위대한 신전을 지었을까? 이 신전 공사에 동원된 사람들은 얼마나 많이 죽어 나갔을까? 세상의 금은보화가 다 거기에 모여 있습니다. 위대한 신전이 거기에 다 있습니다. 이방의 신전 치고 자그맣고 소박한 신전은 하나도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가짜이기 때문입니다. 진짜라면 그렇게 화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가짜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혹하게 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대단하다고 여기며 압도감을 느끼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엄청난 규모로 짓는 것입니다. 동남아시아에 가보십시오. 이방 신전이 얼마나 대단하게 지어져 있습니까? 그 규모에 있어서 압도적입니다.

사우디아라비아에 가면 두 곳의 성지가 있습니다. 메카와 메디나입니다. 메카는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가 태어난 곳입니다. 메디나는 무함마드가 죽어서 묻힌 무덤이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지 않습니까? 무덤이 대단히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습니다. 1년에 수백만 명의 순례자들이 그곳에 몰립니다. 그런데 그도 역시 한 사람의 인간이었습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의 무덤이 그것을 입증하고 있지 않습니까? 가짜입니다. 가짜이기 때문에 그 무덤이 그렇게 화려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무덤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무덤이 없습니다. 빈 무덤입니다. 부활하셨기 때문에 무덤을 보여 주고 싶어도 보여 줄 무덤이 없습니다. 무덤이 텅 비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키실 때 성막을 짓게 하셨습니다. 성막은 한마디로 말하면 이동용 천막입니다. 텐트입니다. 화려하지 않습니다. 소박합니다. 여기에 폈다가 저쪽으로 옮길 때 다시 접어서 가야 하는 천막입니다. 전혀 화려하지 않은데, 그런데 성막이 위대하고 귀한 이유는 하나님이 그곳에 임재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진짜 아닙니까? 살아 계시고 위대하시고 온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성막에 거하시고 머무르시니, 성막이 하나님으로 인해서 아름다워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그 공간은 화려하게 지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미혹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없는 세상은 바로 그런 세상입니다. 복음이 사실이라는 뜻은, 우리는 복음을 위해서 덧대거나 덧칠하거나 치장하거나 없는 말을 덧붙이지 않아도 된다는 뜻입니다. 복음 그 자체가 힘이 있습니다. 복음 그 자체가 사실이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담백하게 전하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는 진리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능력이 있고 그 자체로 힘이 있는 말씀입니다.

레위기 2장 11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가 여호와께 드리는 모든 소제물에는 누룩을 넣지 말지니 너희가 누룩이나 꿀을 여호와께 화제로 드려 사르지 못할지니라." 구약 레위기에 보면 다섯 가지 제사가 나옵니다. 그중 하나가 소제입니다. 곡식을 곱게 빻아 가루로 만들어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런데 이 소제에 넣지 말아야 할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누룩이요, 두 번째는 꿀입니다. 누룩을 곡식 가루에 넣으면 부풀어 오르지 않습니까? 꿀은 달지 않은 것을 달게 만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