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근대와 근대 이전의 차이는 17세기 과학의 눈부신 발전에서 비롯된다.
- 르네상스 운동은 중세에 속한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근대에 속한다고 보기도 어려우며, 오히려 그리스의 전성기와 닮은 점이 많다.
- 정신적 전망에 관한 한, 근대 세계는 17세기에 비로소 시작된다.
- 과학에 도입된 새로운 개념은 근대 철학에 광범위하면서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 근대 철학의 정초자로 평가받는 데카르트는 바로 17세기 과학을 창안한 과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음.
-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오, 뉴턴으로 이어지는 과학사 관련한 이야기는 생략)
- 근대 과학의 토대를 마련한 과학자들은 반드시 그렇지는 않지만 두 가지 장점을 지니는데, 하나는 한없이 인내를 요구하는 관찰이고, 다른 하나는 대담하게 가설을 세우는 능력이다.
- 둘째 장점은 그리스 철학자들에게서 발견되기도 하지만, 첫째 장점은 고대 후기 천문학자들에 이르러서야 어느 정도 나타났다.
- 지구의 1년 주기 공전에 관한 견해는 단순화 되기는 하였으나, 하루 주기 자전의 경우만큼 뚜렷하지 않았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보다 덜하기는 해도 코페르니쿠스의 체계 역시 주전원들이 필요했다
- 코페르니쿠스의 새로운 천체 이론은 케플러의 법칙이 발견된 후에야 비로소 충분하게 단순한 이론으로 발전했다.
- 코페르니쿠스는 자신의 천체에 관한 가설을 지지할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에, 천문학자들은 오랫동안 그 가설을 거부했다.
- 티코 브라헤는 관측가로서 천문학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그의 관측 결과는 말년에 조수로 일했던 청년 케플러에게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 케플러는 천재가 아니었지만, 끈질긴 노력 끝에 과학자로 성공한 모범 사례로 꼽힌다.
- 그는 티코 브라헤의 관측 자료들을 비추어보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대한 설명이 다소 정확하지 않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 케플러의 위대한 공적은 행성들의 운동을 설명하는 세 가지 법칙을 발견한 점이다. 법칙 중 2가지는 1609년에, 셋째 법칙은 1619년에 발표했다.
- 제 1법칙에 따르면 행성들은 타원 궤도를 그리며, 태양이 초점 하나를 차지한다.
- 제 2법칙에 따르면 한 행성과 태양을 연결한 직선은 같은 시간에 같은 면적을 휩쓸고 지나간다.
- 제 3법칙에 따르면 한 행성의 공전주기의 제곱은 태양과 행성 사이 평균 거리의 세제곱에 비례한다.
- 행성들이 타원 궤도로 운동한다는 법칙은 근대인이라도 쉽게 이해하기 어려워서 전통에서 벗어나 해방되려는 기나긴 노력 끝에 비로소 발견되었다.
- 갈릴레오는 근대 과학을 정초한 과학자들 가운데 뉴턴을 제외하고 가장 위대한 인물로 꼽힌다.
- 그는 미켈란젤로가 세상을 떠난 날에 출생하여 뉴턴이 태어나던 해에 죽음을 맞았다.
- 갈릴레오는 역학에서 가속도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발견했다.
- 갈릴레오는 지상의 움직이는 물체들은 그대로 놓아두면 점점 느려지다가 정지한다고 생각하던 당시 견해에 반대하여 물체를 그대로 놓아두면 일정한 속도로 계속 운동한다고 주장했다. (관성의 법칙)
- 갈릴레오는 최초로 낙하 물체의 법칙을 입증했다.
- 갈릴레오는 같은 물질로 이루어진 큰 덩어리와 작은 덩어리의 속도 측정값 사이에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 갈릴레오는 자신을 후원한 토스카나 공작의 중대한 관심사였던 탄환 같은 발사체에 관한 연구도 했다.
- 갈릴레오는 태양 중심 체계를 열렬히 지지했는데, 케플러와의 편지 왕래를 통해 케플러가 발견한 연구 성과를 기꺼이 수용했다.
- 갈릴레오는 네덜란드인이 망원경을 발명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직접 망원경을 제작하여 재빠르게 중요한 사실을 많이 발견해 냈다.
- 뉴턴은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오가 닦아 놓은 길 위로 걸어가서는 그들의 과학적 작업을 완성하고 최후의 승리를 거두었다.
- 그는 세 가지 운동 법칙을 출발점으로 삼았는데, 제 1법칙과 제 2법칙은 갈릴레오의 업적으로 돌려야 한다.
-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을 통해 행성 이론에 들어 있어야 할 모든 내용, 즉 행성들과 행성들 주위를 도는 위성들의 운동, 혜성의 궤도, 밀물과 썰물의 흐름들을 연역해 냈다.
- 나중에는 행성들이 타원 궤도에서 약간 이탈한 현상도 뉴턴의 법칙에서 연역된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 뉴턴의 승리는 너무나 완벽해서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처럼 결국 과학의 진보를 저해하는 넘어서기 힘든 장애가 될 위험도 안고 있었다.
- 영국에서는 뉴턴이 죽은 다음에도 한 세기가 지날 때까지 과학자들이 뉴턴의 권위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그가 다룬 과학의 주제들에 관한 중요하고 독창적인 연구 성과를 내지 못했다.
- (이하 17세기 과학의 다양한 성과 생략)
- 17세기에는 순수 수학의 진보도 놀라웠는데, 물리학의 작업을 완성하려면 필수불가결한 분야였다.
- 네이피어는 Log를 공표했고, 데카르트를 비롯한 몇몇 수학자의 노력 끝에 좌표 기하학이 탄생했으며, 뉴턴과 라이프니츠는 각각 미적분학을 창안했다.
- 과학 분야의 연구 성과로 당시 교양인의 사고방식은 근본부터 바뀌었다.
- 셰익스피어 시대의 혜성은 여전히 경이로운 존재였지만, 뉴턴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이후에는 혜성도 행성과 마찬가지로 중력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 중렬 법칙이 군림하는 시대가 오면서 마법과 요술이 더는 신뢰 받지 않았다.
- 과학의 발전이 초래한 다른 결과는 인간이 우주 안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대한 사고 방식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킨 일이다.
- 중세의 세계관에 따르면 지구는 하늘의 중심이며, 만물은 인간과 관련된 특정한 목적을 가졌으나, 뉴턴의 세계관에서 지구는 작은 행성에 불과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과학의 일부가 되어버릴 정도로 친숙한 ‘목적’ 개념은 과학적 탐구 절차에서 제거되었다. 누군가 여전히 하늘이 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존재한다고 믿을지도 모르지만, 천문학적인 계산을 할 때 종교적 믿음이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이 인간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는데도 사실상 정반대의 결과를 낳은 까닭은 과학의 승리가 욓려 인간의 자존심과 긍지를 부활시켰기 때문이다.
- 인간이 마침내 과학의 승리를 쟁취하게 되자 겸손한 태도를 유지하기는 불가능했다.
- 서구인들은 급속한 성장을 거듭하면서 부유해져, 온 세상의 주인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 그들은 남-북 아메리카 대륙을 정복했으며, 아프리카와 인도에서 권력을 주도하는가 하면, 중국에서 존경을 받고 일본에서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 이 모든 일에 과학의 승리가 더해지고 나면 17세기 사람들이 자신들이 주일마다 악행을 고백해야 하는 죄인이 아니라 멋지고 훌륭한 사람으로 생각했다는 말은 놀랍지도 않다.
- 현대 이론 물리학과 뉴턴의 이론 체계를 구성하는 각 개념 사이에는 몇 가지 차이점이 있다.
- 우선 17세기 물리학을 지배했던 ‘힘’은 필요 없는 개념으로 밝혀졌다.
- 뉴턴의 물리학 체계 안에서 ‘힘’은 운동량이나 운동 방향을 변화시키는 원인이었으나, 현대 물리학계에서는 점차 힘을 끌어들이지 않고서 물리학의 모든 공식을 기록해도 된다는 점이 기정사실화 되었다.
- 관찰 가능한 대상은 가속도와 상대적 배치 사이의 일정한 관계인데, 이 관계가 ‘힘’을 매개로 성립한다고 보아도 우리 지식을 전혀 확장 시켜주지 않는다.
-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의 영향으로 뉴턴식의 과학철학에 일어난 변화는 절대 공간과 절대 시간의 포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