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를 소개하는 소개서라니, 이게 얼마만에 쓰는 건가요. 사실 살면서 자기소개서는 딱 한번 써봤습니다. 대학 졸업하고 회계사 시험 준비한다고 1년을 날리고 도통 진도가 나가지 않는 하루하루를 벗어나려 작은 벤처회사에 지원서를 넣었습니다. 그 때가 제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쓴 자기 소개서였는데 말이죠. 이번 자기 소개서는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살아온 년수가 쌓이는만큼 길어지는 자기소개서, 어디까지 갈지 저 자신도 두렵지만 어쨌든 시작해 봅니다.
6*25가 터지기 직전 북한에서 월남한 할머니, 할아버지 아래 막내 아들로 자라신 우리 아버지가 탤런트 김창숙씨를 닮은 어머니를 보고 마음에 들어 만난지 세번 만에 결혼하자 청하셔서 나온 첫번째 아이가 바로 저입니다. 부모님 말씀으로는 어렸을 때 부터 순해 빠져서 혼자 누워놓으면 울지도, 뒹굴지도 않고 그 자세 그대로 몇 시간이고 얌전히 부모님을 기다렸다고 합니다. 덕분에 뒷머리가 납작하다고 지금도 아쉬워 하시지만 말입니다. 어렸을 때 부터 책 읽는 걸 좋아해서 책을 손에서 떼지 않았던 저, 4살 때 혼자서 글을 뗄 때 부터 책 좋아할 줄 알았다고 부모님께서 말씀하시곤 했지요. 누구나 자기 자식은 천재라고 믿는 게 부모님이기에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덕분에 어렸을 때부터 공부 잘하는 착한 아이로 자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으셨습니다.
중학교 때까지는 적절히 공부잘하는 착한 아이로 지냈는데 아쉽게도 고등학교 올라가면서 기대를 무너뜨리기 시작했습니다. 대신 적당히 공부하는 적당히 성실한 학생으로 안착했지요. 그래도 책 좋아하는 것만큼은 변하지 않아서 수험공부 대신 니체와 헤르만 헤세, 도스토예프스키에 빠져들고 세상의 온갖 야한 이야기를 세계고전문학전집을 통해서 배웠습니다. 스탕달의 ‘적과 흑'의 몇몇 장면은 사춘기 소녀의 얼굴과 마음을 벌겋게 만들 정도로 에로틱했습니다.
당시는 몰랐지만 지금 돌아보니 오늘의 제가 있게 된 순간이 바로 고등학교 때 결정되었던 것 같습니다. 바로 문과와 이과의 결정입니다. 중학교 때 수학과 물리를 너무나 사랑해 문학소녀 라는 흔한 닉네임 대신 과학소녀 라고 불러달라 했었던 제가 고등학교 2학년 올라가면서 이과가 아닌 문과를 지원한 건 지금 생각해도 아쉬운 부분입니다. 처음 이과를 가려고 했을 때 누군가가 제게 ‘너 이과간다고? 너 공부 그렇게 잘해?’라며 의아해하며 물은 것이 큰 부담이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꽤나 소심했었나 봅니다. 그런 얼토당토한 이유로 결국 이과를 지원하는 대신 문과를 지원했습니다. 그리고 문과에서 그나마 이과와 비슷해 보이던 경영학과를 지원하겠노라 결심했습니다. 물론 당시 유행했던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멋진 정장과 구두를 신고 외국인과 악수하는 여자 주인공을 보고 나도 저렇게 외국인들과 일하는 비즈니스 우먼이 되겠다고 결심한 것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만약 인생을 돌아가서 다시 결정한다면 이번에는 기필코 이과를 선택해서 그 바닥을 보고 싶다는 게 제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바램입니다.
원했던 대학은 아니지만 원하는 학과는 들어가서 기대에 찬 대학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대학 생활은 세 가지 측면에서 제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첫번째, 대학생활을 통해 태어나서 처음으로 지방에서 생활한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서울 촌사람인 제게 서울이 대한민국의 전부가 아니며 나는 보지도 알지도 못했던 각양각색 환경에서 자란 다양한 사람들이 이 사회 구성원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꼈습니다. 두번째, 입시에서 벗어나 마음껏 다른 종류의 책을 읽고 토론하는 즐거움을 얻었습니다. 저의 3대 인생 책을 대학생활 하면서 만난 건 어찌보면 당연한 지도 모릅니다. 세번째,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과 자존감을 얻었습니다. 대학교 2학년 때 우리집의 생계를 책임지시던 어머니 건강이 안 좋아져 뜻하지 않게 어머니가 운영하시던 동대문의 옷가게를 제가 맡아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가게는 도매와 소매를 같이 했기에 저녁 8시에 가게로 출근해서 당일 팔 상품을 구매하고 정리하여 밤 9시 30분부터 본격적으로 지방에서 올라온 상인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였습니다. 새벽 3-4시 즈음, 지방 손님들이 떠나고 나면 물건을 정리하고 쪽잠을 자다가 아침 7-8시, 어김없이 학교 도서관으로 숙제하고 수업 들으러 가는 생활을 1년 가까이 했습니다. 당시는 몰랐는데 지나고 보니 많이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지나보니 몸무게가 7kg나 빠졌더라구요. 그래도 다행히 어머니 가게를 예전과 비슷한 매출을 이루며 운영할 수 있었고 1학년 때에 이어 2학년 때도 성적장학금을 받을 정도로 좋은 성적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지금 생각해도 나름 뿌듯합니다. 그리고 덕분에 깨달았습니다, 나는 장사와는 안 맞는다는 것을요. 그리고 나란 인간은 어찌되었건 주어진 일은 하는 사람이란 것도 알았습니다. 누가 뭐라해도 신경쓰지 않고 내 할 일을 할 수 있다는, 그래도 괜찮다는 소중한 경험을 얻었습니다.
무사히 어머님께서 완치하시고 3학년이 되어서야 온전히 대학생활을 즐기게 된 저는 연애에 심취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성적이 스물스물 떨어지기 시작했지요. 어찌 보면 고등학교 때와 비슷한합니다. 1, 2학년때는 좋은 성적을 거두다가도 막상 성적이 좋아야 할 고3, 그리고 대학 후반기에는 성적이 그저그런 패턴으로 떨어지니 말입니다. 그 와중에 주워 들은 건 있어서, 취직 대신 회계사가 되어 전문직으로 일하면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늦었지만 회계사 시험 준비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공부와 연애는 함께 할 수 없는 법, 공부도 연애도 성에 안차는 상황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이후 1년을 날리는 제 인생 최악의 시기에 돌입합니다. 그 시기를 견디다 못해 작은 벤처회사라도 들어가야겠노라고 제 인생 처음의 자기소개서를 쓴 것이 바로 그때입니다.
당시 제가 썼던 자기소개서가 꽤나 특이해서 면접관들의 관심을 받았고 운이 좋게도 한번에 합격했습니다. 합격이라고 어디 자랑하지도 못할 작은 회사였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이 회사에서 함께 일하던 상사와 함께 회사를 나와 다른 벤처와 합병하는 이상한 경험도 합니다. 일하느라 정신없었던 당시 생활,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끝에 끝까지 일해 봤습니다. 아침 9시부터 6시까지는 클라이언트 회사에 파견나가 일하고, 저녁에는 실력을 늘려보겠노라고 웹프로그래밍 강의를 듣고 밤 10시 경 다시 사무실로 돌아와 회사 일을 했습니다. 나름 팀장이라고 이런 저런 결과물을 확인해달라고 기다리는 동료들의 이메일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새벽 4시, 장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부모님의 차를 타고 집으로 들어가는 생활이 반복되었습니다. 사람들 눈을 피해 화장실에서 쪽잠을 자는 스킬(?)을 얻은 것도 바로 이때입니다. 그리고 몸을 혹사시켜 공부하면 결국 하나도 남지 않는다는 때늦은 교훈도 이때 알았습니다. 둘째, 당시 회사에서 일하면서 지금 저랑 가장 친한 친구, 저의 짝꿍을 만났습니다. 합병한 다른 벤처회사에서 건너온 제 친구는 같이 프로젝트 한 적은 없지만 같이 밥 먹고 술 먹으며 안면을 트고는 나중에 동시에 회사를 그만두는 계기로 친구가 되었습니다. 물론 그 친구는 멀리 대전의 연구소로 갔지만 말입니다. 셋째, 다양한 대기업들을 클라이언트 회사로 만나면서 작은 회사에서 동경했던 대기업도 사실 별거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습니다. 이 때 같이 일했던 클라이언트 회사가 제 일이 마음에 들었다며 자기네 회사로 옮겨 오라고 제의해서 결국 대기업에서 일하는 경험도 하게 되었지요.
대기업에서 웹마케팅 전문가로 일하면서 느낀 것이 학벌의 중요성이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몰랐는데, 회사 안에서 서울대, 연대, 고대로 줄이 좌악 서있더라구요. 서울의 그저 그런 학교 출신에 공채도 아니고 경력직 특채 출신인 저는 이도저도 아닌 외톨이구나 싶었고 과연 얼마나 더 이 회사에서 진급하고 버틸 수 있을까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때마침 새로 오신 옆팀의 팀장이 미국에서 경영대학원, 흔한 말로 MBA를 마치고 막 돌아오셨더라구요. 말로만 듣던 MBA라니요, 주변에서 인정받는 그 모습을 보고 나도 MBA라는 걸 해봐야겠다는 욕심이 들었습니다. 결국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고 회사생활 하면서 모았던 돈을 아낌없이 뿌려대는 어학연수라는 걸 떠납니다.
원래 영어에 큰 뜻이 없었던 저, 제 영어로는 소세지 피자 한 조각 제대로 주문하지 못한다는 걸 깨달은 어학연수 기간, 그래도 수확은 있었습니다. 어학연수 하면서 대학원 시험을 준비하여 아이비리그 MBA는 아니지만 이름 대면 알만한 MBA 프로그램에 입학할 수 있었으니까요. 등록금때문에 고민하는 제게 학교에서는 장학금에 생활비까지 제공해 주었고 이후 운좋게도 MBA 인턴으로 일했던 회사에 취업이 되어 졸업 후 뜻하지 않게 미국 시카고에서 직장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미국에서는 이름만 대도 아는 회사에서 프로젝트 매니저로 일하게 되어 기뻤지만 이왕이면 미국 바깥에서도 알아줄 IT회사에서 일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기 시작하던 즈음, 꿈꾸던 IT회사에서 혹시 관심있으면 자기네 회사로 오지 않겠냐는 뜬금없는 제의를 받았습니다. 2번의 전화 인터뷰와 5번의 직접 인터뷰를 거치고 취직이 되어 결국 시애틀로 옮겨 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프로덕트 매니저로 서비스 부문, 그리고 모바일 앱 부문에서 일했습니다.
즐거웠던 일도 많았지만 계속되는 영어와 승진의 중압감과 더불어 더이상 일이 즐겁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시작된 재택근무로 작업 환경이 더 좋아졌는데 일에 대한 회의가 사라지지 않던 어느날 스티브 잡스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나는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며 스스로에게 묻는다. 오늘이 내 인생 마지막 날이라면 오늘 내가 하려는 일은 하고 싶어 할것인가? 그리고 그 대답이 아닌 날이 너무나 오랫동안 계속되면 무언가 바꾸어야 한다.”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며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드는 날이 계속되고 책상 앞에 앉아 읽으려고 쌓아두었던 책을 읽고 여행을 다니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한마디로 백수의 삶을 사는 내 모습을 꿈처럼 떠올리는 날이 몇 달이고 계속되었습니다. 그걸 견디다 못해 얼마 전 용기있게 회사를 그만두었습니다. 딱 1년만 쉬었다가 아니다 싶으면 다시 회사에 들어가면 되지 라는 안일한 생각에서, 무모하게 시작한 백수생활, 지금은 이 생활이 너무나 좋아 가능하면 앞으로도 계속 놀고 싶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여행도 가지 못하는데도 이렇게 행복하니 코로나 끝나고 여행이라도 다니기 시작하면 다시 일 시작하는 게 더 싫어지겠지요?
여기까지가 두서없이 장황한 저의 자기소개서입니다. 너무 지루하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뭐, 할 수 없지요. 자기자랑이 들어가 있는 것 같아 한심하긴 하지만,그런 속물적인 모습도 제 모습이겠지요. 한번 정도는 생각나는데로 솔직하게, 제가 바라보는 제 모습을 있는 그대로 써보고 싶었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