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인생에나 귀인 한 명쯤은 있다. 인생의 이정표가 되어준 귀인부터 술 먹고 길바닥에 쓰러진 나를 집까지 데려가 준 일면식도 없는 귀인까지. 내 삶에서도 크고 작은 귀인들이 여럿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은 베트남 파견 시절에 만난 사람이다.

나의 파견 초기 생활은 고통이었다. 국제개발이고 나발이고 적당히 몇 달 있다가 파견 생활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바퀴벌레, 모기, 박쥐와의 동거는 고통스러웠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나 자신을 짓누르는 ‘국제개발협력 활동가다워야 한다’는 착한 아이 컴플렉스가 가장 큰 고통이었다. 늘 웃어야 한다든지, 분노를 표현하면 안 된다든지, 항상 현지 직원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한다든지… 나의 국제개발협력 처음은 그랬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는데 셀프로 사로잡혀 자신을 압박했고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알 길이 없어 답답했다. 한국에서는 친구들을 만나 맥주를 마시며 고충을 자연스레 해소했으나 페이스톡도 없던 시절 베트남의 시골 마을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조건이었다. 그렇게 파견 생활이 3개월 정도 지났을 무렵 우리 기관의 하노이 사업소에서 일하던 1년 선배 간사를 만났다. 난 숨은 맛집을 잘 아는 사람을 보면 형광등 100개를 켜놓은 듯한 아우라를 느끼는 편인데 이 선배 간사가 딱 그랬다. 이 사람은 하노이 구석구석 나를 데리고 다니며 현지식, 한식, 중식, 일식, 양식, 북한식 등을 맛보여주었다. “하노이를 서울처럼 다니시네요?”라는 나의 질문에 그는 “저 서울 출신 아닌데요?”라는 특유의 전라도 억양으로 톡 쏘았다. 좀 재수 없었지만, 맛집을 많이 아니 그냥 넘어갔다. 그의 찐 맛집 리스트 덕분에 우린 모일 때마다 맥주 수십 병을 비우고 일출을 봤다.

그는 자신의 색을 유지하려 애쓰는 사람이었다. ‘좋은 건 좋다, 싫은 건 싫다’를 확실히 하는 사람이었다. 여자보단 사람으로 바라봐주길 바랐고 그를 여자로 대하는 사람은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러다가 쌩얼로 나온 날에 “오 너 쌩얼도 괜찮다?”고 하면 히죽대며 좋아하던 모습은 이중적이지만 꽤 귀엽고 좋아 보였다. 그는 일에서도 확실했다. 늘 최선을 다했다. 국제개발협력 활동가라는 자부심이 있었고 이 일을 여러 사람과 함께 잘하고 싶어 했다. 이기적인듯 하지만 이타적인 성격이 멋있었다. 아이디어도 많았고 욕심도 많았다. 스스로를 늘 “독한 년”이라며 한 발짝이라도 더 나아가고자 채근했다. 그는 파견 생활을 어떻게 하면 되는지 몸소 보여주었고, 난 그 덕분에 어렵사리 파견 생활에 적응했다. 우린 자주 만나 밤새 세상을 논하며 우정을 쌓았고, 난 당초 계획보다 긴 2년의 베트남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커리어 우먼을 꿈꾸던 그는 생각보다 이르게 결혼했다. 그리고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그렇게 그의 국제개발협력 커리어는 멈추었다. 임신과 출산은 파견 활동가의 금기사항이었던 걸까. 그도, 나도, 고충을 들은 우리도 임신 사실을 본부에 밝힌 후 수월히 이뤄졌던 재계약이 불발된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게다가 그 이유가 ‘업무 능력 부족’인 이유도 모른다. 이후 그는 한국으로 돌아와 아이를 키우며 지역사회를 위한 일을 했다. 그는 늘 베트남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고, 끊긴 개발협력 커리어를 이어가고 싶어 했다. 꿈 많은 그에게 탈출구를 마련해주고 싶던 나는 글쓰기를 제안했다. 분명 그의 이야기에 동감할 사람들이 많을 터. 사람들과 교감하길 좋아하는 그는 자신의 글에 위로받을 이들이 있음에 쾌감을 느낄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술 ‘탱커레이’를 필명으로 김칩에 에세이를 쓰기 시작했다.

그는 어느 순간 갑자기 개발협력과 동떨어져 버린 삶을 에세이로 메웠다. 창작의 고통은 힘들었지만 나름의 카타르시스에 꽤나 재미있어했다. 개발협력을 좋아하는 주체적인 여성으로서 본인이 맞닥뜨렸던 삶을 특유의 톡 쏘는 스타일로 매월 글로 녹여냈다. 그는 그렇게 언젠가 다시 현지로 나가 하고 싶은 일들을 맘껏 벌일 꿈을 놓지 않았다. 그러던 그가 얼마 전 몸이 너무 아파 더 이상 글쓰기가 어려울 것 같다고 전해왔다. 지병이 있음에도 자존심을 이유로 본인 아픈 내색을 안 하는 친구라 더 물어보지 않았다. 몸이 괜찮아지면 다시 하자는 말로 그가 지키고 싶어 하는 자존심을 지켜주고자 했다. 그를 만나지 않았다면 진작에 개발협력을 그만두었을 나였기에 안 좋은 컨디션에도 정기적으로 글을 보내준 그에게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가 쓴 마지막 에세이의 제목은 “떠나는 자의 소회”였다. 그리고 이 글은, 언젠가 꼭 베트남으로 돌아갈 거라던 내용의 에세이는 국제개발협력 활동가 탱커레이가 세상을 떠나며 남긴 마지막 에세이가 되었다. 지병으로 인해 아픈 줄로만 알았던 그는 생각보다 지독한 병을 앓고 있었고, 남들보다 조금 이르게 다음 세상으로 떠났다. 자칭 “독한 년” 탱커레이는 외부에 자신의 상태를 알리지 않으려 했다. 지독한 병마를 깨부수고 다시 ‘짠’하고 나타나려 했다. 마지막까지 그렇게 자기다우려 노력했다.

필명 탱커레이, 고 이한나 활동가. 한나는 내게 자기다움을 가르쳐주었다. 지옥 불에 떨어져도, 목에 칼이 들어와도 자기다움을 지키는 것이 어렵고 척박한 개발협력씬에서 살아남는 선결 조건임을 깨우치게 해주었다. ‘~를 위해’라는 수식어를 습관처럼 사용하는 이 분야에서 그는 개발협력은 나를 먼저 챙기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나의 행복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한나는 뿌리째 뽑힐 듯 취약했던 나의 개발협력 입문 시절을 지지해준 든든한 선배이자 후원자였다. 그리고 그는 나뿐만 아니라 수많은 베트남인의 친구로서, 후원자로서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다움을 잃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파랑새였다.

안녕, 나의 특별한 형제여. 다음 세상에서 적응 못하고 얼타고 있을 나를 다시 만난다면 또 한 번 멋진 선배가 되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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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앤칩스 에세이스트 ‘탱커레이’, 故 이한나 활동가와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故 이한나 (1989. 11. 10 ~ 2022. 11. 23)